아프리카의 민족해방 투쟁이 어떻게 유럽에 민주주의를 가져왔나 (2024년 17호 뉴스레터)

* 본 기사는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의 “How Africa’s National Liberation Struggles Brought Democracy to Europe: The Seventeenth Newsletter (2024)”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이재용(번역자원활동가, ISC)

감수: 심태은(번역팀, ISC)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데 실바(포르투갈), 거리로 나온 시 I, 1974

안녕하세요.

트라이컨티넨탈: 사회연구소에서 인사드립니다.

50년 전인 1974년 4월 25일,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르투갈 민중이 각자 거주하는 도시의 거리로 몰려나와 1926년에 공식 수립된 에스타도 노부(새로운 국가)의 파시스트 독재를 끝장내려 했습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1968년까지)와 그 뒤를 이은 마르셀로 카에타누가 이끌던 파시스트 포르투갈은 1949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55년에 유엔(UN), 1961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1972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은 살라자르와 카에타누 정부의 잔혹한 행위에는 눈을 감은 채 이들과 긴밀하게 협력했지요.

10년 전에 저는 리스본의 알주베 저항과 자유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이 박물관은 1928년부터 1965년까지 정치범을 고문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당시에 수만 명의 노동조합 활동가, 학생 운동가, 공산주의자를 비롯하여 여러 반정부 활동가가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많은 경우 매우 참혹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수백 가지의 이야기에는 그런 잔혹성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일례로 1958년 7월 31일에 고문관들이 알주베 감옥에서 라울 알베스라는 용접공을 비밀경찰 본부의 3층으로 데려가 떨어트려 살해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에 주재하던 브라질 대사 알바로 린스의 배우자인 엘로이사 라모스 린스가 운전하다가 알베스의 추락사를 목격하고, 이를 남편에게 알렸습니다. 브라질 대사관에서 포르투갈 내무부에 무슨 일인지 물었을 때, 에스타도 노부 독재정권은 “충격받을 필요는 없다. 하찮은 공산주의자였을 뿐”이라고 회신했습니다.

존 그린(영국), 농업 개혁을 요구하는 베자의 소농들, 1974

4월 25일 혁명은 이렇게 라울 알베스처럼 ‘하찮은 공산주의자’가 시작한 것입니다. 이 혁명은 리스본 공항 노동자 파업에서 시작하여 브라가와 코빌량 섬유 노동자 파업, 아베이루와 포르투 토목 노동자 파업, 마리냐그란드 유리 노동자 파업 등 1973년에 있었던 일련의 노동자 행동을 바탕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무렵에 독재자 카에타누는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 장군이 쓴 포르투갈과 그 미래를 읽었습니다. 스피놀라는 스페인 내전 중에 파시스트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지휘관들로부터 훈련받았고, 앙골라에서 군사 작전을 이끌었으며, 에스타도 노부 정권 시기 기니비사우의 총독을 역임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책에서 포르투갈이 지배하는 아프리카에서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으므로 식민지 점령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카에타누는 회고록에서 그 책을 읽었을 때 “내가 감지하고 있던 군사 쿠데타가 이제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카에타누도 1974년 4월에 터져 나온 노동자와 역시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군인의 단결만큼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은 식민 전쟁에 지쳐 있었습니다. 에스타도 노부 정권은 엄청나게 잔혹한 전쟁으로도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 민중의 열망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기니-카보베르데독립당(PAIGC),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 등 아프리카에서 생긴 정당의 눈부신 약진과 함께 포르투갈 군대는 18세기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군인을 잃어야 했습니다.  이런 아프리카 운동 중 일부가 소련과 동독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자체적인 힘과 진취성을 통해 식민주의에 맞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동독 국제연구소(IF DDR) 문서 참조).

마리오 마킬라우(모잠비크), 현실의 왜곡, 무제(2), 이윤 코너 연작 중, 2016

1973년 9월 9일에 기니비사우로 파병되었던 군인들이 포르투갈에서 만나 군부 운동(MFA)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1974년 3월에 MFA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군인 에르네스토 멜루 안투네스가 초안을 작성한 민주주의, 개발, 탈식민지화라는 강령을 승인했습니다. 4월에 혁명이 일어나자, 안투네스는 “쿠데타가 발생한 날, 쿠데타 발생 몇 시간 후에 대중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즉시 혁명으로 진화했다. 내가 MFA 강령을 쓸 때만 해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은 군과 포르투갈 민중이 함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안투네스가 ‘군’이라고 한 것은 병사를 말한 것입니다. MFA의 구성원에는 대위보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뿌리가 되는 노동자 계급에 여전히 발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죠.

1960년 12월에 유엔 총회에서는 “모든 형태의 식민지배를 신속하게, 무조건적으로 종식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에스타도 노부 정권은 이 입장을 거부했습니다. 1959년 8월 3일에 포르투갈 군인들은 비사우항의 피지기티에서 선원과 항만 노동자에게 발포하여 50명 넘게 살해했습니다. 1960년 6월 16일, 모잠비크 무에다에서는 에스타도 노부 식민주의자들은 해방을 주장하는 소규모의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했습니다. 이 시위대는 해당 지역의 행정관의 초청을 받아 자기들의 견해를 보여주기 위해 참가했는데 말입니다. 당시 몇 명이 사망했는지는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61년 1월 4일에는 바이샤 도 카산제(앙골라)에서 일어난 파업이 포르투갈의 탄압을 받아 천 명에서 만 명 사이의 앙골라인이 사망했습니다. 이 세 사건을 통해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그 어떠한 시미 운동도 용인할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PAIGC, MPLA, FRELIMO 등의 조직이 총을 들고 이들 아프리카 지역에서 무장 투쟁을 벌인 원인은 바로 에스타도 노부 정권에 있었습니다.

네프와니 주니어(앙골라), (돌아가는 것이) 시급하다, 2021

아고스티노 네토(1922년~1979년)는 공산주의자 시인이자 MPLA의 지도자였고, 독립한 앙골라의 첫 번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상투메 학살’이라는 시에서 포르투갈 식민주의에 맞선 봉기의 정서를 담아냈습니다.

그때, 눈에 불꽃이 일고,

이제는 피가, 이제는 생명이, 이제는 죽음이 찾아왔다.

우리는 승리한 마음으로 죽은 이들을 묻었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에서

사랑을 위해,

조화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자유를 위해

죽음에 직면했어도, 피로 얼룩진 물속에서

시간의 힘을 통해

승리를 향해 축적되는 작은 패배 속에서도

이들이 희생한 이유를 되새겼다.

우리에게

푸르른 상투메의 땅은

사랑의 섬으로도 남으리.

이 사랑의 섬은 프라이아(카보베르데 수도)에서 루안다(앙골라 수도)에 이르는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포르투갈에도 건설되었습니다. 1974년 4월 25일에 40세의 식당 종업원 셀레스테 카에이로는 리스본의 브란캠 거리에 있는 프란진하스 빌딩의 시르라는 셀프서비스 레스토랑에서 근무했습니다. 개업 1주년을 기념하여 레스토랑 사장은 손님들에게 빨간 카네이션을 나눠주기로 했습니다. 셀레스테가 혁명이 일어났다고 사장에게 알려주자, 그는 시르의 문을 하루 닫고, 종업원들에게 카네이션을 나눠주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셀레스테는 집으로 가지 않고 혁명이 일어나는 시내 중심가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몇몇 군인이 그녀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셀레스테는 담배를 주는 대신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인기를 얻자, 바이샤 지역의 꽃집 주인들은 제철인 빨간 카네이션을 나눠주기로 했고, 이는 혁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74년 혁명이 카네이션 혁명, 즉 꽃이 총에 맞선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1974~75년 포르투갈의 사회 혁명은 대다수 사람이 새로운 감수성을 갖도록 만들었지만, 국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포르투갈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는데, 안토니우 드 스피놀라(1974년 4월~9월), 프란시스코 다 코스타 고메스(1974년 9월~1946년 7월), 안토니우 라말류 이아네스(1979년 7월~1986년 3월) 등 제3공화국 대통령은 모두 군과 최고군사혁명 평의회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말단 군인이 아니라, 기득권 장군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결국 에스타도 노부 식민주의의 구체제를 굴복시키고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철수하게 했습니다.

베르티나 로페스(모잠비크) 아밀카르 카브랄에 보내는 찬사, 1973

아밀카르 카브랄(1924년~1973년)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4년 9월에 태어나 에스타도 노부 식민 지배에 맞서 아프리카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다른 누구보다도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하는 모습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1966년에 쿠바 아바나에서 열린 삼대륙 회의에서 카브랄은 구체제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포르투갈에서 앙골라,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까지 정권 자체를 전복하는 것보다 구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일이 더 어려울 것이라 경고했습니다. 카브랄은 탈식민지 이후 주요 투쟁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에 맞선 투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에 맞선 싸움”은 우리 사회, 식민주의로 인한 빈곤, 복잡한 문화적 구성 내 형편없는 위계질서 등 “내적 모순”에 맞서는 싸움이기에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카브랄과 같은 이들이 이끈 아프리카 민족해방 투쟁은 자국의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타도 노부 식민주의를 패퇴시키고, 유럽에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투쟁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모순이 생겼고, 이중 대다수는 다양한 형태로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카브랄이 연설 말미에 종종 이야기했듯이, 투쟁은 계속됩니다(아루타 콘티누아).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비자이 프라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