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서서히 죽어가는 대학
몇 년 전 아시아에서 기술면에서 발전한 한 커다란 대학의 자신감 넘치는 총장의 안내를 받아 학교를 둘러보게 되었다. 저명인사로서의 명성에 걸맞게 그의 양 옆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건장한 젊은 경호원 두 명이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자켓 속에 자동 소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최신 기술의 경영연구소와 신설된 비즈니스 대학원의 빛나는 건물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는 나에게 찬사의 말을 기대하며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칭찬 대신에 그의 캠퍼스에는 어떤 비판적 연구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마치 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중 몇 명이나 봉 춤을 추는지 질문은 받은 것처럼 어리벙벙하게 나를 쳐다보다가, “주목할 만 한 발언이군요” 라며 다소 굳어진 어조로 대꾸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최신 기술의 작은 물건을 꺼내어 손가락으로 재빠르게 열더니 이에 대고 퉁명스럽게 한국어로 말했다. 아마도 ‘저 자식 처치해’가 아닐까 싶다. 그러자 크리켓 경기장만한 리무진이 도착했고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 그 총장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가 탄 차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의 사형선고에 대한 그의 대답이 언제 실현될지 궁금했다. ‘실용’ 교육의 잘못된 약속
실용 교육에 대한 오늘날의 요구는 실용주의의 역사와 상충한다. 실용교육은 한국에서 나타났지만, 세계 거의 모든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케이프타운에서 레이캬비크나 시드니, 상파울로에 이르기까지, 쿠바 혁명이나 이라크 침략 만큼 중대한 하나의 사건이 나름대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인문 비평의 중심지로서 대학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800년의 대학 역사를 가진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대학들을 상아탑이라고 조롱했고, 그러한 조소에는 일정 정도 진실이 담겨있던 것도 사실이다. 대학이 대체로 학내와 사회에서 이루어낸 성과의 차이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증명했고, 대학들로 하여금 너무 열광적으로 단기적인 실용성을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 사회 질서의 관심에 대해 수많은 자기비판을 통해서 되돌아볼 수 있게 했다. 세계적으로 에라스무스, 존 밀턴, 아인슈타인, 몬티 파이튼을 만들어 낸 기관들이 현재 냉혹한 글로벌 자본주의에 항복하면서, 그러한 비판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미국 독자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다. 결국 스탠포드와 MIT이 기업 대학의 전형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풍족함이 없는 미국화가 등장했다. 여기서 풍족함이란 적어도 미국의 민간 교육 분야의 풍족함이다.
이러한 일이 전통적으로 영국 부유층들의 교양을 익히는 학교들인 옥스퍼드나 캠브리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데, 이 대학들은 늘 수 세기에 걸쳐서 넉넉한 기부금을 받는 덕분에 폭넓은 경제 세력들에 대항한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몇 년 전 나는 학자가 아니라 어떤 지점에서 CEO로서의 행동이 기대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옥스퍼드 대학의 학장을 사직했다 (에딘버그에서 지진이 일어날 확률과 마찬가지로 거의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30년 전 내가 처음 옥스퍼드에 왔을 때, 그 같은 전문주의는 귀족적인 경멸로 대접받았다. 실제 동료들 중에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애를 썼는데, ‘박사’는 신사답지 않은 노동의 강도를 나타낸다는 이유로, ‘박사’보다는 ‘씨’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책을 출판하는 것을 저속한 프로젝트쯤으로 여겼다. 포르투갈의 구문이나 고대 카르타고(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도시 국가: 역자 주) 식습관에 관한 10년 단위의 소논문을 허용할 것인지에 대해 이제 막 고려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대학 교수들이 대학생들을 위한 수업 시간을 정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대신 대학의 정신이 학생들에게 포도주 한잔과 제인 오스틴이나 췌장의 기능에 대해 지적인 대화를 요구할 때면, 학생들은 교실에 들르기만 하면 되었다.
오늘날 옥스브리지는 연대감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대학에 돈을 어떻게 투자할지, 캠퍼스 정원에 어떤 꽃을 심을지, 교수 휴게실에 누구 초상화를 걸지, 대학 도서관보다 포도주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하는지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잘 설명할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교수들이다. 모든 중요한 결정들을 대학의 전임 직원들이 결정하고, 재정과 학사 업무부터 일반적인 행정에 이르는 모든 일들은 전반적인 책임을 가진 선출된 위원회가 수행한다. 최근 들어 이 훌륭한 자치 시스템이 대학으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집중화된 도전들에 부딪혔고, 이 때문에 나는 새로운 출구를 찾았으나 대학은 여전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옥스브리지 대부분은 전근대적인 기관이기 때문에, 분권화된 민주주의 모델로 삼을만한 부분이 크지 않고기 때문에 그 끔찍한 특권을 계속해서 즐기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 다른 대학들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교수들이 자치를 하지 않고 지배층, 비잔틴적 관료주의, 거의 없지만 모든 궂을 일을 도맡아 하는 조교수와 제너럴 모터스를 운영하는 듯 움직이는 대학 부총장에 의해 움직인다. 현재 수석교수들은 수석 매니저들의 역할을 수행하며, 감사나 회계에서 가면 대단히 탁한 공기이다. 유인원 시절이나 있을 법한 황량한 기술 발전 이전의 현상을 다루는 책들에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최소한 영국 대학 중 한 곳은 교수가 자신의 연구실에 가질 수 있는 책장의 수를 제한해서 “개인 서고화”를 막아야 한다. 지금은 종이가 구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에 쓰레기통은 티파티를 즐기는 지식인만큼이나 드물다.
일정 기간에 걸쳐서 영국 대학에서는 연구가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표현주의나 종교개혁에 관한 과정이 아니라 연구이기 때문이다.
실리적인 행정가들이 아무 의미 없는 로고들로 학내를 뒤덮고 어설픈 글쓰기 실력으로 작성한 칙령을 폭력적으로 발표한다. 북 아일랜드 대학의 한 부총장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함께 공유했던 학내에 남아있던 유일한 공간을 징발해서 지역의 주요인사와 기업들과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개인 공간으로 바꿔버렸다. 학생들이 시위를 하며 그 공간을 점유하자 그 부총장은 개인 보안요원들을 동원해서 그 식당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없애버렸다. 영국 대학의 부총장들은 수년 걸쳐 자신의 대학들을 파괴해 왔지만, 그만큼 상상력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같은 대학의 경비원들이 배회하는 학생들을 찾은 것 마냥 그 공간에서 학생들을 쫓아냈다. 산발을 한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은 없지만,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곳이 대학이다.
이러한 대학 교육의 실패 가운데, 대학을 더욱 궁지로 몰고 가는 것은 무엇보다 인문학이다. 영국은 과학, 의학, 공학을 공부하기 위한 대학들에는 계속해서 자금을 지원하고 있지만, 인문학을 위한 중요한 재원에는 지원을 끊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정책이 변화지 않으면 앞으로 모든 인문학과는 사라질 것이다. 영어학과가 살아남는다면 그 이유는 경영학 학생들에게 세미콜론의 사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일 뿐이지, 노스럽 프라이(캐나다인, 가장 뛰어난 문학평론가이자 20세기 활동가 문학이론가, 토론토 학파를 주도함: 역자 주)나 라이오넬 트릴링(미국의 문학 비평가: 역자 주)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문학과는 현재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주되게 운영되는데 이는 등록금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작은 기관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사실상 사유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영국이 반대한 사립대학이 훨씬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이미 데이빗 카메론 수상이 등록금의 높은 인상을 예견했고, 이는 인문학과들이 자금줄에 목말라하는 시점에서 학자금 대출에 의존하는 학생들이 자신의 현금에 대한 보상으로 보다 높은 수준의 교수와 더 많은 개별 관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국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연구보다 돈이 덜 되는 사업이었다. 돈이 되는 것은 표현주의나 종교개혁 과정이 아니라 연구다. 몇 년 마다 정부는 영국 내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철저한 조사를 실시하는데, 학부마다 연구결과를 고통스러울 만큼 세부 사항에 이르기까지 평가한다. 이 평가 결과에 근거해서 정부 보조금이 결정된다. 따라서 교수가 가르치는데 힘을 쓰기에는 보상이 너무 적고, 대단히 초점 없는 글들을 찍어내고 불필요한 온라인 저널을 시작하고, 정말로 필요한 연구인지 판단하지 않은 채 의무적으로 외부 연구지원에 신청하고, 자신의 이력서를 늘리는데 묘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등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해야 할 이유는 대단히 많다.
어쨌든 국가평가활동의 끈질긴 요구와 경영 이데올로기를 번성시킨 영국고등교육에서 확산된 관료주의로 인해 교수들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수업을 준비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일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도 할 시간이 없는데, 지난 몇 년 사이에 가르치는 일은 그럴 가치조차 없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평가위원은 각주로 가득 찬 논문에는 점수를 주지만, 학생이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쓴 잘 팔리는 교과서에 대해서는 점수를 주지 않는다. 교수들 대부분은 소속 기간에 휴가를 내어 가르치는 일은 접고 연구에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을 확보하여, 소속 기관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재원을 더 많이 끌어 모우는 방법은 학문을 포기하고 또한 재정 지출의 주범인 아까운 월급들을 줄이고 대학 관료들이 이미 과도한 짐을 지고 있는 교수들에게 업무를 분담시키는 서커스에 참여하면 된다. 영국의 많은 교수들은 수많은 고객 명단에서 뽑아낼 수 있는 누구나 하는 이름과는 다르게, 소속 기관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을 찾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실제 2-30년 전에는 학자들이 선뜻 일하고 싶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많은 고용인들에게 그렇게 즐겁지 않은 대학에서 조기 은퇴를 하려는 교수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이들은 또한 연금 삭감에 당할 처지에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