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C 소식] 세월호 성찰과 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국제연대 포럼: 증언-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에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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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저는 일반학교에 다니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고3이 된지 얼마 안돼서, 수능준비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는 다른 반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제주도 가는 배가 침몰했데, 수학여행 가는 애들도 있었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주 큰 배라고 했고,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고 했습니다. 막연히 ‘모두 구조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굣길에 들은 소식은 “아무도 구조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멀었던 집에 가는 길이 어쩐지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가는 길 내내 ‘멍’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관련 뉴스였습니다. 평소에 슬프거나 힘든 내색을 잘 안하시는 엄마의 표정도 이날은 어두웠습니다.

“엄마, 정말 전원구조 아니래?” “응. 얘들 불쌍해서 어떡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부터 뉴스에는 ‘인양하는 데 얼마가 드는지’, ‘유가족이 얼마를 보상받을 수 있는지’ 모두 돈과 관련된 이야기들만 나왔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 친구를 잃은 아이들을 위로하는 기사는 보기 힘들었습니다. 혼자 살겠다고 제일 먼저 도망쳐 나온 선장을 보며 분노했습니다. 갑자기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유병언 소식은 당시 배우고 있던 소설과 너무 닮아있어서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학교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12개의 반 중에서 딱 한 반만 복도에 노란리본을 걸어놓았습니다. 추모가 정부에 대한 저항처럼 여겨지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학교에서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말하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조용히 가방에 노란리본을 달 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1주년이 되던 날,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빨리 세월호가 인양되길,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제대로 밝혀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에 있는 합동 분향소에 꽃을 전해주러 갔습니다.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꽃 한 송이 전하러가는 길에 경찰차 벽이 서있었습니다. 너무나 길고, 견고했습니다. 죽은 이에게 꽃 한 송이 주지 못하게 하는 이 나라는 무섭기까지했습니다.

왜 진실을 자꾸 숨기려고 하는 지, 무슨 문제가 있길래 그러는지 답답함을 안은 채 2주년이 지났습니다. 인양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섣부른 작업 탓에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강정으로 가는 400톤의 철근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습니다. 세월호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잘 모르니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핑계되는 스스로가 미워지는 순간이 많습니다. 세월호 세대인 저는 세월호 사건을 겪은 우리가 함께 눈물 흐리고, 공감하는 것이 조금만 더 당연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발표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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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를 다니고 있는 이솔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세월호는 절대로 잊지 못할,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당시, 저는 1학기 여행으로 제주도에 있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기 불과 이틀 전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온 상태였습니다. 그날은 도보 이틀차였고, 세화리에서 지미봉을 지나 성산일출봉 앞을 지나서 월정으로 가는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도보할 준비를 마치고 하염없이 예쁜 제주바다를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걷고 또 걷고 몸이 지칠 때 쯤, 점심식사를 할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성게 비빔밥을 먹으며 발을 주무르고 있는데, 그날따라 지도교사 선생님과 친구들이 자꾸 TV를 쳐다봤습니다. 저는 식사 중에 TV를 쳐다보면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들 눈치를 보면서 TV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TV에서 무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오후 도보를 마치고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로드스꼴라에서는 항상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 닫기모임이라는 것을 하는데, 그날 닫기모임은 이상했습니다. 선생님 중 한분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 뉴스에 나왔는데, 제주도를 향해 오던 어떤 배 한척이 지금 침몰되고 있다고. 너희 아까 점심에 뉴스로 보지 않았냐고. 실종된 아이들과 죽은 아이들이 많다고. 여러분 또래라고. 그때의 저는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배 한척이 침몰하고 있다니, 내 주위에서 전혀 일어날법하지 않은 일이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2014년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눈물을 보였습니다.

제주도에서 여행을 마치고 핸드폰을 한 달 만에 켰는데, 각종 SNS가 세월호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당연히 구조될 줄 알았던 사람들은 구조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배는 그대로 바다 속에 잠기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흔히 접했던 언론에서는 그저 유병언의 행적을 찾는 것에만 급급했습니다.

학교에서 세월호에 대해서 기억하고 공부하는 자리가 여러 번 마련되었습니다. 언제 한번 다이빙 벨이라는 다큐 영화를 봤는데, 그때 다이빙 벨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해경은 왜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는지, 다이빙 벨을 내리지 못하게 하는지 화가 났습니다. 언론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을 전달해야하는 언론이 왜곡된 보도자료를 흘리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언론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서울로 돌아왔을 때 유가족 분들은 한창 세월호에 대한 진상규명과 인양을 촉구하는 범국민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1학기를 마치는 종강파티 때 우리도 서명을 받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세월호에 대해서 공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로드스꼴라 5기, 6기와 선생님들이 모여 세월호와 관련된 기사를 몇 개 읽었습니다. 유가족 분들에게 보상금을 얼마 주겠다, 특례입학을 시켜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들이었습니다. 세월호가 왜 침몰하게 되었는지 진상규명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인데, 언론에서는 그저 보상금과 특례입학 이야기만 했고, 세월호에 관심 없던 사람들은 그런 기사만 보고 세월호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생명의 존엄성보다 돈을 중시하는 이 사회가 너무 싫었습니다. 언론은 그저 이슈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세월호에 대해서 공부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유가족 분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관련 집회에 나가고, 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생각을 하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호는 단순히 유가족 분들만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나의 일이라는 것을. 단지 돕겠다는 생각으로 집회에 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자발적으로 집회에 나가고 뉴스나 관련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월호에 대해서 알고 싶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어떤 사건을 규정할 때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당연한데, 세월호는 그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고,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통령은 세월호가 침몰되고 바로 다음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집회가 있는 날이면 대통령은 항상 자리를 비우고 해외에 나가있었습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언제쯤 세월호에 대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배가 인양이 될까요. 언제쯤 우리의 목소리가 정치인에게 닿고, 개인의 존엄성이 돈 앞에 무시되지 않을까요.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발표자: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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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에 다니고 있는 학생 배경진입니다. 2014년 4월 16일, 그 날의 기억은 제 머릿속에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 때 제주도 도보여행 중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밥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 뉴스를 통해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습니다. 배는 기울어져 있었고 그 위에 헬기가 떠다니는 영상이 보였습니다. 사망자 몇 명, 실종자 몇 명, 생존자 몇 명, 이 숫자를 보고 ‘아, 벌써 사람이 죽었구나, 이제 더 이상 죽는 사람 없이 다 구조했으면 좋겠다.’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에서 배를 들어 올릴 수 있는 인양선을 보내주겠다고 했고, 활발하게 구조작업 중이라 해서 이제는 다 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말을 믿고 다시 걸었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다시 밥 먹을 때가 돼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본 뉴스는 처음 봤던 뉴스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심각해져 있었습니다. 반 정도만 기울어져있던 배는 더 심하게 가라앉아있었습니다. 사망자 수는 오히려 더 늘어있었고 생존자 수는 더 줄어있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대기업에서 보내준다던 그 인양선들은 왜 안 왔으며, 생존자의 수는 왜 더 늘지 않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뉴스에서는 현재 구조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사고는 왜 발생한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기보다 1인당 사망시 최고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더 중요하게 보도했습니다. TV에서 보여주는 영상도, 하는 말도 계속 같았습니다. 도보여행 중이라 핸드폰도 없었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매체가 식당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뿐이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하나도 알지 못 했습니다. 너무 아는 게 없으니 계속 의문만 쌓여갔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길 기도하는 수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정보를 찾을 수 없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파악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너무 답답하고 이상했습니다.

제가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건 한 달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SNS나 민영방송을 통해서였습니다. 우리나라 3대 공영 방송과 신문사는 사고 발생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왜 사고가 발생했는지, 왜 구조를 하지 못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병언’이라는 사람을 찾기에 급급했고, 단원고 학생들에게 어떤 ‘특혜’들이 부여될지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놨습니다.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 앞에서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이 사람들이 왜 구조되지 않았는지,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보상금이 얼마인지가 더 먼저인 이 뉴스들에서는 도저히 인간적인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터진 후 이제 저는 공영방송 뉴스나 신문 기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지 항상 의심하게 됐고, 항상 다른 뉴스나 기사를 찾아보게 됐습니다. 유명 연예인의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하면 저 기사로 어떤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지를 먼저 의심하게 됐고, 대형 언론사의 기사보다는 SNS를 더 신뢰하게 됐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뉴스나 신문을 믿지 못하고 살 것 같습니다. 저는 언제쯤 맘 편히 뉴스를 볼 수 있을까요?

발표자: 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