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기념관] 또 다른 벽 너머에
글: 케일리 클레이바(기행 참가자)
번역: 황정은(사무국장, ISC), 심태은(국문 편집장, ISC)
민주인권기념관의 요새같은 담벽을 따라 걸으면서 섬뜩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리고 보안 철문 옆에 드리워진 나무 아래에서 이 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소개를 듣기 시작할 때만 해도 평화로웠다.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던 이 곳은 당시에는 해양과학연구소로 위장하고 있었다. 연구소라는 건물 이름과 주변을 둘러싼 요새는 벽돌담 안쪽에서 계속되던 공포를 가렸다. 이전에는 경찰 소유였던 이 건물은 시민사회단체의 관리 하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국제전략센터(ISC) 역사기행을 통해 한국 민주화운동가들에게 자행된 만행뿐 아니라 경차이 어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에서 기능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동권, 민주화, 그리고 군사정권 타도 요구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때는 광주 민주화항쟁이 군홧발에 짓밟히고 군사 정권이 한국 사회를 뒤덮은 시대였다. 경제 성장이라는 미명 하에 한국의 산업은 인권을 희생시키며 성장했다. 당시 정부는 정당성이 없었고, 한국 민중은 여러 문제에 대해 진보적 요구를 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 대공분실은 국가가 사회운동의 지도자와 활동가를 억류하고 사회운동을 탄압하는 데 이용한 장소 중 하나이다. 이곳에 잡혀온 사람들의 가족들은 그들의 행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념관의 해설사는이곳에 잡혀왔던 사람들이 끌려갔던 길을 따라 건물 외벽에 숨겨진 뒷문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5층에 있는 조사실로 이어지는 촘촘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서 당시 이 계단을 걸었던 사람들이 느꼈을 것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어떤 냄새가 났을까? 그들은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 기념관에 인접한 높은 건물에서 근무하던 직원들은 당시 옆 건물을 내려다 보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대공분실 인근 주민은 담벼락 안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조사실이 있는 층의 녹색 문들은 기행동안 들었던 세세한 고문의 흔적들을 담은 작은 방들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초점은 아니었다. 이번 기행에서 나에게 가장 크게 남은 것은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진보와 고문의 과거사를 볼 수 있는 더 좋은 방법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이 건물은 역사, 유물, 소통이라는 독특한 전시 방식을 통해 대공분실의 조사실에서 스러져간 희생자들의 삶을 기리고 있다. 각 방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에 놀랐고, 이러한 차이점이 모여 전체적인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사실 중 하나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1]. 다른 조사실은 일부 가구를 치우고 화장실도 개조하는 등의 리모델링을 거쳤다. 경찰이 개조한 조사실은 원래 고문과 취조에 사용되었던 조사실의 모습을 지워버렸다. 김근태가 고문을 당한 방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서울대생으로 박정희의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던 김근태는 이후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 그는 1985년 체포되어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받은 후에도 계속 정치권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대선에도 출마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장기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병 때문에 2006년 세상을 떠났다. 다른 고문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조사실의 보존에 관여했던 것처럼 김근태의 딸도 김근태가 조사받았던 그 방의 디자인에 깊이 관여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고문 도구를 전시하고 싶어했지만, 김근태의 딸은 그 방이 아버지를 추모하고 희망을 주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따뜻한 나무톤과 벌집 모티브가 있는 서재로 꾸몄다. 그 덕에 방문객들은 나무 의자에 앉아 그의 삶의 일부를 들여다 보고, 안쪽의 공간에서 그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아래 층에 있는 전시실은 희생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보여준다. 계엄령 철폐, 호헌 철폐, 민주화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희생자들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촉매가 되었다.
그 이후의 민주화 과정은 고문 피해자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 뿐만 아니라 자유와 사회 통합을 부정하는 권력 구조에 대한 저항을 기리는 의식화와 추모에 기반한다. 나는 민주인권기념관을 방문하면서 경찰 폭력이 있었던 중앙 유럽[2]의 역사가 떠올렸다. 독일 베를린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명한 박물관에서는 역사를 기리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한다. 서울의 민주인권기념관은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국가 폭력에 희생된 희생자를 기리는 반면, 부다페스트의 공포의 집, 베를린의 스타지[3] 박물관은 공산주의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기린다는 차이가 있다.
스타지 박물관 건물은 동독 시절 동베를린의 비밀경찰 본부로 쓰였다. 그 곳의 경찰은 시민의 자유와 정치활동보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하에 동독 시민이 남아 있도록 할 목적으로 위협, 협박, 강요에 사용하기 위한 정보를 방대하게 수집했다. 동독 정권이 권력과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구속적인 체제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일반인의 견학이 가능한 박물관이 되었고, 동베를린 주민은 당시 기록물을 보러 가기도 한다. 내가 그 곳을 방문했을 때 안내해주셨던 분은 전 직원이었는데, 자신이 일을 할 때 이러한 첩보 활동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매우 개인적이었고, 보존이 잘 된 사무실, 파일 캐비닛, 복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언젠가는 그러한 모든 것이 첩보의 증거로 남겨질 것이라 생각한다. 1990년 시민권 활동가들의 관리 하에 문을 연 이래로, 박물관의 관리는 시민 사회, 지자체, 중앙 정부 사이에서 끊임 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가 풀기 어려운 근현대사와 화해하면서 소유권의 모자이크가 베를린, 그리고 독일의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서울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통행불가 골목이나 길이 끊긴 곳을 볼 때면 궁금증이 생겼다. 서울의 경관을 해치는 전체주의적인 회색의 직사각형 아파트도 1970년대와 80년대 사이 인권을 발판 삼아 경제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그런 면에서 이런 아파트는 동독시절 베를린과 부다페스트와 많이 닮았다.
부다페스트 공포의 집은 방문객에게 매우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입구에서 소련 시절의 탱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각종 안내문이나 시각 전시물은 영화 세트에 들어선 것처럼 느껴지도록 잘 기획 되어 있다. 방문객은 당시 경찰 제복을 입어보거나 국가 전화를 사용하고, 거대한 깃발과 소련 관련 주요 기사 사이를 걸어보거나 먼 과거를 구성하는 흑백사진을 볼 수 있다. 지하에는 감옥이 재현되어 있는데, 이 곳으로 가려면 희미하고 깜빡이는 불빛에 삐걱대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천천히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타야만 한다. 감옥은 당시 국가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거나 고문을 당했던 수감자들이 얼마나 황폐한 조건에 있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의 전 수석 고문이 이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사실은 박물관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오르반 총리와 정부는 외국인 혐오, 극우 민족주의, 역사 수정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헝가리만이 유일한 외세 침략자의 희생자이며 그러한 침략 정권에 부역했던 헝가리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비판은 현 정부와 정부의 합법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까지 이어진다.
대공분실 건물을 설계한 김수근은 당대 내로라 하는 건축가였다. 그가 설계한 건물에는 잠실 종합운동장, 자유센터, 서울대학교 예술대 건물 등이 있다. 김수근 혼자 이 을씨년스럽고 폐쇄적인 건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높은 지위와 기저에 깔린 국가의 승인은 당시 정부가 건물의 외관보다는 내부의 특수한 기능을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에서는 가로수길을 더 넓게 확장하고 이전보다 작은 돌을 깔았다. 나폴레옹과 조르주외젠 오스만은 (좁은) 거리를 이점으로 삼으려는 혁명가들을 진압하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이유로 새로운 길을 설계했다. 이러한 새로운 거리 디자인의 도입으로 당국은 바리케이드나 도로포장용 돌 등 도로에 있는 사물의 투척에 대한 위협 없이 유동인구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집회를 진압하는 경찰과 군대를 투입했던 당시 정부도 이 같은 전략을 인프라 건설에 녹여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발전에 대한 시각적인 인상은 황량하고, 고압적이며 압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기능을 수행했던 민주인권박물관과 같은 건물이 역사적 대화를 끌어 안는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