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아프가니스탄: 거짓 위에 세워진 미국의 기나긴 전쟁
번역: 이재오 (번역팀, ISC)
* 본 기사는 Links International Journal of Socialist Renewal의 “Afghanistan: The United States’ longest war was founded on false pretences”를 번역한 글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끝은 시작과 똑같았다.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결과가 무엇인지 전혀 확실치 않았다. 2001년 당시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은 4대의 여객기가 피랍되고 5,000여 명이 사망한 9/11 테러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곧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역시 한 달 만에 급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1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행한 작전은 9/11 이전에 이미 진행 중이던 미국의 대외 정책과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사실 대(對) 아프간 공작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1978년 지미 카터 정권 때 시작되었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를 비밀리에 지원한 공작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변론하였다:
1979년 7월 3일 카터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의 친소 정부에 대항하는 반대파들에게 비밀 원조를 제공하는 첫 번째 명령에 서명하였다. 바로 그날 나는 대통령께 편지를 보내 반대파를 지원하는 것이 소련의 개입을 초래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설명해 드렸다…(중략) 비밀공작은 탁월한 전략이었다. 소련을 아프가니스탄이라는 함정에 끌어들인 것이다… (중략) 베트남 전쟁 같은 경험을 소련도 겪게 할 기회였다… (중략) 탈레반의 몰락과 소련의 몰락, 그깟 성난 무슬림 몇 명과 동유럽의 해방 및 냉전 종식 중에서 세계 역사에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아프간 무슬림을 단결시켜 소련군에 맞서 싸우게 만든 CIA의 공작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극단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이후 소위 “레이건 독트린”이라고 알려진 정책은 소련 전투기 타격에 효과적인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하는 등 원조의 양과 질을 크게 증가시켰다. 미국은 약 35억 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아프간 이슬람 무장 조직에 투자하였다. 1989년 소련군의 철수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무기 원조를 종료하였지만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조직과의 전략적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미국의 여러 전략가는 탈레반을 지원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아파에 적대적인 정권을 확립하는 것으로 이란의 역내 영향력을 크게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아흐메드 라시드의 저서 <탈레반>에 잘 나와 있다. 라시드는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와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특파원으로서 급진적인 이상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라시드는 미국이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유라시아에 동맹국과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1980년 이란에 제재를 가하는 자충수로 인해 유라시아의 복잡한 정치 경제 정세에 진입하는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고 분석한다. 1989년 소련 철수 이후 내전이 벌어져 아프가니스탄은 혼돈에 빠졌고 아프간 반공 투사는 탈레반이라는 중무장 비밀결사로 결집하였다. 탈레반은 평화 회복과 이슬람 전통 율법 유지, 이슬람 국가로서의 아프가니스탄 정체성 수호를 천명하였다. 라시드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이 탈레반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핵심 이유는 에너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주요 석유 수송로로 사용하려면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이 안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인해 국가 전체가 빠르게 붕괴하고 있을 때 오직 탈레반만이 아프간 대중을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탈레반은 권력을 잡은 후 끝이 없을 것처럼 생각되던 약탈과 부족 간, 종파 간 분쟁을 저지하고 외곽 지역 대부분을 비무장화했다. 탈레반과 교류하던 미국 외교관 중 일부는 그들이 미국 바이블 벨트(근본주의 개신교의 영향이 큰 미국 남부 지역)의 거듭난 기독교인과 같다며 탈레반을 정의로운 구세주로 보기까지 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미국은 소련과 싸울 이슬람 용병을 아프가니스탄 바깥에서 고용하도록 조장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탈레반도 똑같은 전법을 구사했지만 이제는 그 상대가 미국과 서방 국가들로 바뀐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에 의하면 미국 정부의 주요 과업은 “불안정한 유라시아”에서 “그 어떤 국가 혹은 국가 연합도 미국을 축출하기는커녕 미국의 결정적인 영향력을 제한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2001년에도 1990년대와 같은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장기적 전략 목표를 간과하고 9/11 테러만을 본다면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원인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 전략목표와 천연자원의 통제라는 두 가지 이유로 미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라시아 중심지역에서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전문가들은 아프가니스탄이 중앙아시아와 카스피해의 석유를 서방세계로 수송하는데 가장 편리한 경로로서 전략적인 요충지라고 분석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지르는 1,270킬로미터 길이의 송유관으로 카스피해 분지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파키스탄 남쪽 아라비아해로 수송한다면 미국은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통제하는 불안정한 페르시아만에 덜 의존할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미국의 정유회사 유노칼(UNOCAL)은 아프간 종단 송유관 건설과 관련하여 탈레반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였고 부시 정권의 주요 후원자인 엔론은 유노칼을 위해 타당성 분석 사업을 맡았다.
2001년 9월 10일, 미국의 석유 산업 주간지인 <오일 앤 가스 저널>은 중앙아시아가 지질 탐사와 분석에 있어 세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위대한 개척지이며 “막대한 규모의 석유와 가스 자원을 탐사, 생산, 수송 및 정제하는데 투자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9/11 테러 발생 며칠 전, 미국 에너지정보국은 “에너지 측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이 중요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종단 송유관 건설을 포함하여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아라비아 해로 수송하는 경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발표하였다.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충돌한 여객기는 그저 미국이 독단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정치적, 군사적 통제를 강화할 핑계를 제공했을 뿐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하에 미군은 이전까지 들어가본적 없던 지역에 깊숙히 진입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구소련 국가에 13개의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였다. 2002년 우즈베키스탄이 처음으로 미군기지를 수용하였고 곧 키르기즈스탄과 타지키스탄이 뒤를 이었다. 저 멀리 떨어진 카자흐스탄까지 미군 주둔에 필요한 다양한 정책과 연합훈련을 비롯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게 2000년대 초 중앙아시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여 미국은 카스피해 분지의 풍부한 석유 및 가스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고 동시에 러시아의 역내 영향력을 제한하였다. 이 모든 과정은 미국이 냉전 종식 이후 유라시아에서 가장 유력한 도전자로 여기던 중국에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개전 후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부시 정권은 탈레반 이후 아프간 정부의 형태를 논하며 송유관 개발을 언급했다. 2001년 12월 15일 뉴욕타임즈는 “국무부는 탈레반 축출 이후 역내 에너지 사업을 추진할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전투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부시 대통령은 미국 석유 회사 유노칼에서 고문으로 일하던 아프간계 미국인 잘마이 칼릴자드를 아프간 특사로 임명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걸린 경제, 금융 이해관계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 인선이었다. 특사로 임명되기 전 칼릴자드는 구소련 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질러 파키스탄을 통해 인도양까지 닿는 송유관 사업의 위험 분석을 맡았다. 수많은 비즈니스 계약, 수많은 석유와 가스 자원들, 수많은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미국과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음모라기보다는 일상적인 비즈니스였다.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교차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각본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오랫동안 미국은 인권보다 석유를 위시한 경제적 이익을 우선시해왔다. 그런데 9/11 테러 직후 바바라 부시 영부인이 하루아침에 진보적 여성주의자로 둔갑해서 탈레반 정권 아래 여성 인권 탄압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사실 탈레반 정권의 뿌리가 되는 이슬람 무자헤딘이 1970년대 친소 아프간 정부와 싸울 때 자금 지원을 제공한 것이 바로 미국인데 말이다. 근본주의를 따르는 무자헤딘은 여성에게 교육과 취직의 기회를 제공하던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싸웠고, 세속주의 정부가 무너짐에 따라 탈레반 독재정권은 모든 공공장소와 교육제도에서 여성을 배제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 내에서는 개전 초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목표에 대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고 아프간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고, 일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에 위협이 될만한 테러 조직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라고 여겼다. 그러나 사실 아프가니스탄에서 분쟁이 지속되는 원인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군대의 주둔이었다.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더 일찍 철수했더라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 페이퍼>는 아프가니스탄 특별감찰실(SIGAR)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분석한 것을 2019년 워싱턴 포스트가 정보공개법을 통해 출판한 것이다. 2019년 12월 9일에 출판된 <아프가니스탄 페이퍼:전쟁의 비사>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약 2,300명의 미군이 전사하고 2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연히 아프간인들이 겪은 고통은 훨씬 컸다. 부시와 오바마 정권에서 자문을 맡은 미 육군 퇴역 중장 더글러스 류트는 2015년 SIGAR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이해했다면 뜬구름 잡는 장밋빛 연설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지만, 오바마 정부 이전에는 그런 이해를 할 기미도 없었다. 경제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 “풍요로운 시장 경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지만, 사실 “풍요로운 마약 시장”을 목표로 잡았을 걸 그랬다.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보다 더 나쁘다고 장담한다. 근본적인 이해의 부족, 과대 포장된 목표, 과도한 군사력 의존, 필요한 자원에 대한 인식 부족이 모두 겹쳐있다.
미국을 선두로 한 서방세계의 개입 덕분에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초의 진정한 마약 국가가 되어버렸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의 연간 아편 생산량은 약 180톤이었지만 미국 침공 이후 1년 만에 3,000톤으로 올랐고, 2007년에는 8,000톤, 2018년에는 9,000톤(세계 헤로인 생산의 93%)까지 불어났다.
미국과 동맹국이 군대를 철수시킨 이제 “그깟 성난 무슬림 몇 명”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아프가니스탄의 운명은 이제 아프간인 그 자신의 손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