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더 많은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
요약 번역: 심태은(번역팀장, ISC)
* 본 기사는 Tricontinental의 “Create Two, Three, Many Saigons. That Is the Watchword: The Thirty-Third Newsletter”를 요약 번역한 글입니다.
2021년 8월 15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탈레반의 수중에 넘어간 수도 카불을 탈출해 우즈베키스탄으로 도망쳤다. 하미드 카르자이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 무자헤딘 지도자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함께 조정위원회를 결성했다고 밝혔고 세 사람은 정부 구성을 촉구했다.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것은 미국에게는 큰 패배이다. 2001년에 미국이 탈레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지 몇 달이 지나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탈레반 정권은 종식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0년 동안 2조 2,610억 달러를 투입하고 24만 1,0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도 미국은 패배했다. 그렇지만 그조차 탈레반과 씨름해야 하는 아프가니스탄 민중에게는 그다지 위안거리가 되지 못한다.
1967년 4월 16일 쿠바의 계간지 트라이컨티넨탈(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연대를 위한 조직(OSPAAAL)의 기관지, 2019년 폐간)은 체 게바라의 “더 많은 베트남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글을 게재했다. 체 게바라는 게릴라 투쟁으로 베트남 민중을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8년 후, 미국 관료와 친미 베트남인은 사이공에 있는 CIA 빌딩 꼭대기에서 헬기를 타고 베트남을 빠져나갔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제국주의가 세계 각지에서 패배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바로 전 해에 포르투갈이 앙골라, 기니 비사우, 모잠비크에서 패배했고, 태국의 노동자와 학생이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1976년에 격렬하게 투쟁했으며,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가 4월 혁명으로 집권했고, 이란 민중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 샤(Shah)를 상대로 투쟁해 1979년 1월 혁명을 이룩했다. 또한 섬나라 그레나다에서는 사회주의 뉴 주얼 운동이 혁명을 이끌었고, 1979년 6월 니카라과에서는 산디니스타가 친미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를 몰아냈다. 이들 모두가 사이공이요, 제국주의의 패배이며, 민족 해방의 승리였다.
그러나 각국은 사회주의 속성을 가진 그 어떠한 실험도 용납하지 않는 미국과 그 동맹 세력의 분노를 맞닥뜨렸다. 미국 정부는 갖가지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이들 국가의 주권을 부정하고 전면적인 굴종 상태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는 부채 위기와 대리전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진행되었다.
1974년 UN 총회에서 신 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 NIEO) 결의안을 통과시킨 비동맹 국가들은 IMF와 미국 재무부를 비롯한 서구 주도의 금융 기관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비동맹 국가의 부채 위기가 발생했다(1982년 멕시코 디폴트 사태 등). 또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정정 불안을 조장할 목적으로 대리전과 정권 교체가 자행되었다(1976년 태국 군사 쿠데타, 아프가니스탄과 니카라과에서 벌어진 대리전, 그리고 1980년 이라크의 이란 침공 등).
우리는 1970년대 서구 정책이 초래한 폐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보이는 서구의 무자비함은 반(反)혁명과 자유주의적 개입주의가 가진 속성을 잘 보여준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1978-1992)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최악의 정치 세력에게 막대한 자원을 지원했고,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와 공모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장관이었던 아나히타 라테브자드는 1978년 집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내외 적들이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집할 것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아나히타는 1978년 카불 뉴 타임스에 여성의 인권(교육, 일자리, 의료 서비스 등에서의 평등)을 주장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에 품었던 희망은 이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절망의 그림자는 탈레반을 비롯해 탈레반 같은 신정(神政) 파시스트를 지원한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파키스탄에 드리워져야 한다. 2001년 아프간 전쟁에서 아나히타 라테브자드 같은 여성은 그 존재가 무시되었다. 아프간 여성이 자신을 구제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여서 미국의 공중 폭격과 관타나모 수용소가 필요한 것이라는 논리가 편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이 최악의 신정주의자와 여성 혐오 세력(헤크마티아르 등 탈레반과 다를 바 없는 세력)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부정하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무자헤딘을 지원해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을 공격했고, 소련의 마지못한 개입을 이끌어 냈으며 파키스탄 군부독재 꼭두각시와 아프간 반혁명 세력을 활용해 소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에 압박을 가했다. 소련의 철수와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붕괴는 더 참혹한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탈레반이 탄생한 것이다.
미국이 무자헤딘을 지원하지 않았고 아프가니스탄 민중이 사회주의 미래의 가능성을 누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시행착오는 겪었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미국이 패배했다고 주권과 사회주의 의제가 실현되는 장밋빛 미래가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티 역시 아프가니스탄처럼 미국의 지독한 개입주의의 희생양으로서 미국 주도의 쿠데타를 두 번이나 겪었고 정치와 경제가 점령당했으며 최근에는 지진으로 고통받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의 아프간전 패배는 미국의 이라크전 패배(2011)를 떠올리게 한다. 맹렬한 미군의 공격도 이 두 국가를 굴복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립된 국가를 하루아침에 파괴하는 가공할 무력을 가졌음에도 끝내는 세상을 원하는대로 하지 못했던 미국의 나약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좌파 대통령이었던 모하메드 나지불라는 1980년대에 국가화해 정책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아프가니스탄 내 (지역 및 열강의) 세력이 다양하기 때문에 모두가 모여 합의를 이룩하지 않으면 갈등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카르자이의 요구 역시 이것의 연장선상이다. 그렇지만 탈레반이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그렇다면 탈레반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에 이해가 걸린 주변국(중국 포함)으로부터의 압박이 아닐까 한다. 7월 말에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은 탈레반의 바라다를 만나 테러리즘을 지원할 것이 아니라 일대일로에 동참하는 실용적인 선택을 할 것을 촉구했다. 아무리 가는 동아줄이라고는 하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의 장관을 지냈던 슐레이만 라예크는 1959년 자신의 시 ‘영원한 열정’에서 미국의 개입으로 초토화된 사람들의 열망을 노래했다.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미국의 점령이 끝난 것과 또 다른 사이공이 된 것에 대체로 기뻐하고 있지만, 이것이 인류의 승리는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악몽과도 같은 지난 수십 년의 세월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