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탈시설 1 _ 장애인은 왜 시설에 갇혀 살아야 하는가?
차한선(정책연구팀)
필자는 뇌성마비 장애여성이다. 경증장애인이어서 시설근처에도 가보지 않았고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학창시절을 보내고 이후 대학생활도 할 수 있었으며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인간이 살고 싶은 곳에서 간섭을 없이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살 권리에 동의한다면,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광범위한 지역사회로부터 고립된 채 공동생활을 하도록 강요하고,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결정과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없으며, 조직의 필요가 거주하는 개인의 필요보다 우선되는 곳(유럽집행위원회, 2012)’에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는 근대기를 거치면서 노동능력이 부족한 장애인에 대해 시설수용 중심의 정책을 펴왔다. 미국만 보더라도 시설 설립이 최고조에 달했던 1970년대에는 700명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시설에 2800명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대규모 시설 위주의 정책은 미국 연방법원의 ‘펜허스트 판결(1978년)’을 계기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대규모 시설인 펜허스트처럼 지역사회와 분리되고 불평등한 환경에서는 삶의 질이 향상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주 정부가 모든 시설 거주인에게 새로운 주거지와 생활환경을 마련해줄 것을 명한 것이다. 뒤이은 ‘옴스테드 판결(1999년)’ 역시 지역사회 치료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된 정신장애인들에게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기반 치료를 제공할 것을 명하였다. 이후 미국은 장애인 정책을 지역사회 위주 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장애 - 비장애를 분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영국의 경우에는 정부정책이 사회서비스를 통제하는 방식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과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1990년 ‘지역사회 돌봄법’을 시작으로 2004년 ‘돌봄법’에서 지방정부로 하여금 장애인 ‘돌봄 및 지원계획’을 세우고, 그 평가에 기초해 ‘개인예산’을 제공할 의무를 부담하도록 한 것이다. 캐나다는 장애인의 지역사회통합을 촉진하기 위해 ‘사회통합법’을 제정하여 비용의 직접지불이나 지역사회 서비스 등을 체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호주 역시 매우 구체적으로 체계적인 장애인통합계획이 지역사회서비스계획과 함께 추진되고 있다. 스웨덴은 일정 기간 내에 모든 시설을 폐지하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1993년 ‘장애인 지원 및 서비스법’을 제정하여 국가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1997년에는 남아 있던 장애인 수용 병원 및 시설을 폐쇄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이렇듯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사정에 맞는 탈시설-사회통합 정책을 고안하고 시행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사회는 30,000여명이 넘은 장애인당사자들이 시설에 거주하며 엄격한 집단 규율 아래서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여 인간의 존엄이 무색할 정도로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시설거주 당사자들은 그동안 자기결정권이 없는 거주의 강요로 지역사회로부터 분리된 채 획일화되고 집단적인 생활로 인하여 인권침해 및 학대 등에 노출되어 왔고, 한번 장애인 거주시설에 입소한 경우 사회적·경제적 여건의 미비로 탈시설을 통한 지역사회 정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즉 보통의 삶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어 있는 시설에서의 삶은 고통의 기록이자 욕구와 희망이 무시되는 절망의 현장이며 시설거주 장애인의 80%는 비자발적 입소자인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은 ‘시설사회’라는 오명을 얻을 만큼 장애인, 노인, 아동청소년들을 오랜 세월 시설에 분리 수용해왔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이 1970년대부터 시설 중심 복지를 반성하며 탈시설 정책을 추진한 반면, 우리는 70년대부터 오히려 시설을 늘려왔으며 아직도 ‘산 좋고 물 좋은 곳’에는 대형화된 장애인 거주시설, 정신장애인 시설 등이 존재하고 있다. “왜 그러한 곳에 시설은 들어섰는가? 서울 한복판 종로에는 왜 그러한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이 들곤 한다. 그것은 장애인들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고 싶지 않은 이들이 언젠가부터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요즘은 지하철에서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시설에 갇혀 살던 이들이다. 이들은 어떻게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었을까? 그들을 나올 수 있게 한 것이 탈시설화이다.
탈시설화란 장애인이 시설 수용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에 거주하며 지역의 주체로 자립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즉 탈시설화는 ‘장애인이 지역공동체에서 존엄한 삶을 향유하기 위한 전제요건이며, 시민권을 회복하는 것(김명현, 2011)’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점점 알 수 없어진다.” 시설에 사는 이들의 호소이다.
탈시설 후 자립을 이룬 장애인당사자들은 입을 모아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정 집단을 범주화하고 분리하는 시설 중심 복지는 이제 완전히 재고되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탈시설 모델처럼 이제 우리도 장애인당사자의 자립과 생활통제권에 중심을 둔, 장애인들이 지역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맞춤형 재가서비스를 확대하고, 대형 시설들을 줄여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탈시설’이 국정과제로 명시되어 있는 만큼, 크로아티아 사례처럼 UN의 탈시설 권고를 국가주도 하에 과감하게 이행되어야 한다.
근본적으로탈시설화는 물리적 장소의 이전이 아니라 정책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거주시설 중심의 정책에서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복지서비스 체계를 갖추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체로서 삶의 방식과 서비스 이용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법과 제도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보편적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것이 ‘탈시설’ 이후의 보장하는 삶의 핵심이다. 그리고 탈시설이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는 약자를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기준이 ‘효율’ 중심이 아닌, ‘가치’ 중심으로 이행하는 데에 핵심적인 정책이기 때문이다.우리사회안에서 손에 닿고, 눈에 보이는 곳에서 부딪히며 함께 살아야 한다.
탈시설은 단지 대형거주시설을 폐쇄해야 한다는 등의 물리적 공간만의 문제가 아니며 시설에 살던 장애인이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어야 한다. 탈시설을 선택한 장애인들 중 다수가 가족의 돌봄에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족의 돌봄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함께 책임져야한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국가의 준비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시작되지 못하면 그것은 아마도 시도될 수 없을 것이다. 정부가 탈시설화-사회통합 정책을 국가의 책임과업으로 인식하고 이행해야한다.
장애인들이 존엄하게 살 수 없다면, 우리 모두의 삶도 존엄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김도현[2007]
*동정은 싫다/조지프.P.사피로[2010]
*장애인의 탈시설권리/김명연/민주법학/Vol.0 No.46 [2011]
*존엄한 삶과 장애인 탈시설정책/김명연/公法硏究(Public Law)Vol.44 No.3 [2016]
*한국의 장애인 탈시설 현황과 과제/박숙경/지적장애연구/Vol.18 No.1 [2016]
*서울시 장애인거주시설 탈시설 실행방안 연구보고서[2020]
*장애인탈시설지원법토론회자료집_탈시설의 개념과 법적쟁점[2020]
*장애의 역사/킴닐슨[2020]
*보건복지통계연보[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