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진보포럼] 낙태법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은 거리에서의 투쟁
인터뷰: 조이 영미 블랭크(ISC 네트워크팀)
기사작성: 매튜 필립스(네트워크팀)
번역: 김지은(서울여성회)
국제전략센터(ISC)와 서울여성회는 지난 8월 28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위기, 미국 사례로 보는 여성의 재생산권”이라는 주제로 진보포럼을 개최했다. 아래 기사는 8월 진보포럼에서 ISC 네크워킹팀의 조이 영미 블랭크가 사회주의해방당(PSL) 기관지 리버레이션뉴스의 편집장이자 당의 여성주의 잡지인 브레이킹더체인스의 스탭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이스 체디악(Joyce Chediac)과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편집해 요약한 것이다.
질문) 먼저 간략히 자기소개 해주시고 어떻게 그리고 언제부터 레드스타킹의 여성의 재생산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소개해주세요.
답) 물론이죠. 저는 뉴욕시에서 자랐고 1969년에 레드스타킹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해에 레드스타킹은 미국의 낙태 현황에 대해 처음으로 전국적인 연설이 있었습니다. 12명의 여성이 그리니치 빌리지의 한 교회에서 무대에 올라 300명의 대중 앞에서 자신 또는 친구의 낙태 경험 혹은 낙태 시도 경험에 대해 공유했습니다.
아무도 낙태, 특히 낙태와 관련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 여성은 두 명의 정신과 의사가 자신이 아이를 가질 만큼 안정적이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녀가 한 일 중 가장 현명한 일이었다고 말했어요. 낙태를 한 또 다른 젊은 여성은 낙태를 하려고 10개의 의료기관을 전전했는데, 10번째로 방문한 병원은 불임수술에 동의하면 낙태를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20살에 불과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말씀드린 건 이런 경험담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런 연설은 청중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곧 일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국적으로 울려 퍼지는 총소리 같았습니다.
투쟁의 때가 왔다고 느낀 사람들은 증언하기 시작했고 이는 시위의 물결로 이어졌습니다. 남성이 주도하는 낙태 관련 회의를 중단시키기도 했죠. 우리의 입장은 낙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전문가는 의사도, 장관도, 정치인도 아닌, 낙태를 했거나 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낙태권 투쟁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낙태법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은 거리에서의 투쟁이었죠.
사람들은 저소득층 여성이 낙태를 받을 수 있도록 낙태 시술법을 배우기로 한 여성 단체인 시카고의 제인 공동체(Jane Collective)처럼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해!”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우리도 이에 가세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4년 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통해 전국적으로 낙태권 합법화를 이뤄냈죠.
질문)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을 때 어떠셨나요?
답) 매우 화가 났어요. 우선,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이 판결이 뒤집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대다수는 어느 정도 낙태권을 지지하고, 특히 태아 생명권 법안(향후 제정될 것으로 예상됨)은 전혀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태아 생명권 법안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으면 심각한 악법는 것을 알게 되죠. 하지만 우파는 대중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앞장서서 이런 일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낙태가 합법화된 주에서는 법에 대한 혼란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낙태 방조나 태아 상해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하며 유산과 관련된 상황에서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합니다. 일부 주에서는 이에 대한 처벌이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최대 99년의 징역형과 막대한 벌금이 부과될 수 있어요. 그래서 유산을 하고도 열흘 정도 하혈하면서 누가 봐도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까지 치료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사례도 있었습니다. 낙태법이 가장 엄격한 텍사스에서는 의사가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 가늠하기 어려워하기에 유산 치료가 위험한 시술이 되었습니다.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면 어떻게 사회에서 평등한 주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는 사회에서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입니다.
질문) 왜 현재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이 자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권리도 위험에 처해 있나요?
답) 저는 미국의 우파와 지배계급이 자신의 모든 특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건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재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분리하되 평등하다’는 흑인에 대한 통념을 주장하던 시설들이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죠. 이 판결을 통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러니까 흑인들은 미국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자 극우파와 복음주의가 연합합니다. 저는 원래 극우파가 낙태에 대해 그 어떤 의견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극우파는 복음주의자가 기꺼이 거리로 나가 낙태 클리닉 앞에서 시위하며 사람들이 클리닉에 가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게 바로 1980년대에 미국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일입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도덕 다수당(Moral Majority)의 대표인 제리 팔웰을 백악관에 초대했고 이는 양측의 더욱 굳건한 동맹으로 이어졌습니다.
질문) 이전에 글로벌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 다른 인터뷰에서 말씀하셨는데요. 우리가 주목할만한 좋은 사례가 있습니까? 한국이나 미국 및 다른 지역의 시민들은 어떻게 서로를 지원할 수 있을까요?
답) 저는 이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질문을 주셔서 매우 기쁩니다. 이게 바로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하게 되어 너무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이 자리가 서로 연대하거나 이를 위해 서로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출발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낙태권 문제와 관련하여 멕시코 여성들은 그동안 연대의 마음을 보내왔습니다. 러브 딜리버런스(Love Deliverance)라는 단체는 미국 여성의 낙태를 돕겠다고 밝혔죠.
또 유럽에는 낙태약을 우편으로 제공하겠다는 단체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연대에 매우 감동받았고, 기꺼이 연대의 마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과 다른 곳의 자매들과도 연대하고 싶기에 이를 실현할 방법과 최적의 소통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자본가는 전 세계적으로 연대하잖아요.
우리의 투쟁은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도 전 세계적으로 연대해야 합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위해 몇 십억 달러가 넘는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미국 세금에서 나오는데 이 돈은 가정에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돈은 한국의 자결권을 제한하는 데 사용되고 있죠.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싸울 수 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가장 고통받는 건 여성과 가족 구성원이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많은 이슈가 있습니다. 상당히 기대가 되는 부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