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주들이 박물관에 가야 총을 볼 수 있는 세상 (2024년 44호 뉴스레터)
* 본 기사는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의 “A World Where Our Grandchildren Have to Go to a Museum to See What a Gun Looked Like: The Forty-Fourth Newsletter (2024)”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이재오(번역팀, ISC)
감수: 심태은(번역팀, ISC)
안녕하세요.
트라이컨티넨탈: 사회연구소에서 인사드립니다.
1919년 윈스턴 처칠은 영국의 전쟁장관으로서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반란군 문제에 대해 “미개한 부족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강력히 권장한다”고 말하며 가스가 “공포를 잘 퍼뜨릴 수 있고 피폭자들에게 심각한 영구적 피해를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혔습니다.
화학전은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최루 가스를 사용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이는 독일이 1915년 4월 염소 가스를 사용한 것과 1915년 12월 (폐로 침투하여 질식에 이르게 하는) 포스겐 가스의 사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염소와 포스겐을 무기화한 프리츠 하버 박사(1868-1934)는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하버 박사가 개발한 사이안화수소계 살충제 치클론 A와 치클론 B가 그의 가족 중 일부를 포함하여 6백 만 명의 유대인을 죽인 홀로코스트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정말 슬픈 사실입니다. 화학무기가 “피폭자들에게 심각한 영구적 피해를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한 처칠의 말을 부정하듯, 1925년 제네바 의정서는 “질식성, 독성 또는 기타 가스 및 세균학적 전쟁수단의 전시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처칠의 평가는 가스로 공격할 “미개한 부족들”의 생명을 무시하는 전쟁 프로파간다에 불과했습니다. 1915년 유럽의 참호에서 진흙과 가스를 뚫고 나온 한 이름 없는 인도인 병사는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서 “이를 전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이는 전쟁이 아니다. 세상의 종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종전 이후 버지니아 울프가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는 한 퇴역 병사가 공포에 질려 “세상이 떨리고 흔들리고 불타오르려 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병사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불꽃에 잠식되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NATO의 도발이 핵겨울을 위협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을 자행하여 온 세상을 공포로 떨게하는 지금 저 병사의 말은 다시금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저 말을 돌이켜 보면 우리가 백 년에 걸친 이 악몽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고 전쟁 없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지 궁금하게 됩니다. 그런 궁금증은 실질적인 증거가 아니라 막연한 희망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살육과 전쟁에 지쳤습니다. 우리는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원합니다.
10월에 있었던 16차 정상회담에서 BRICS의 아홉 회원국은 “폭력의 확산”과 “세계 각지에서 지속되는 무장 분쟁”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카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선언문의 결론은 전쟁보다 대화를 선택해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선언문의 취지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군축 보좌관이었던 존 맥클로이와 소련 UN 대사 발레리안 A. 조린 간에 이루어졌던 1961년 협상의 메아리와도 같습니다. 전면 완전 군축을 위한 합의된 원칙에 관한 맥클로이-조린 협정은 두 가지 중요한 요점을 제시했는데, 첫째로 “전면적이고 완전한 무장 해제”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 전쟁은 더 이상 “국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중 그 어떤 것도 어젠다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을 필두로 한 북반구가 성난 용처럼 불을 뿜어대면서 상대방과 합리적인 협상에 나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스며든 오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카잔 기자회견에서 BBC 스티브 로젠버그 기자에게 북반구 지도자들이 “언제나 러시아를 깎아내리려 한다”고, 그리고 “러시아를 2등 국가로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반구에 대한 북반구의 자세를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월감입니다. 세계는 평화를 원합니다. 평화가 있으려면 합리적이고 동등한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합니다.
평화는 두 가지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극적 평화가 있고 적극적 평화가 있습니다. 소극적 평화는 세계 각지의 국가들이 군사력을 증강하더라도 비교적 전쟁이 없다면 나타나는 평화입니다. 쏘지 않을 총도 사서 모아두기에 군사 지출은 수많은 나라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극적인 평화입니다.
적극적 평화는 사회의 귀중한 부를 인류가 마주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평화입니다. 적극적 평화는 그저 총성과 군사 지출의 종식이 아니라 빈곤, 기아, 문맹, 절망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투자를 대폭 확대하는 것입니다. 발전, 즉 인류가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현재에 재생산하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적극적 평화를 필요로 합니다. 사회가 생산하는 부는 부자들의 주머니를 채우거나 전쟁 기계를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배를 채워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휴전을 원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 평화와 발전의 세계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손주들이 총이 무엇인지 보려면 박물관에 가야 하는 세상을 원합니다.
1968년, 미국의 공산주의자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가 “시(나는 세계대전의 첫 세기에 살았다)”를 썼습니다. 저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펴내는 신문을 그린 시구와 우리가 기억상실증에서 깨어날지 묻는 루카이저를 떠올리곤 합니다.
나는 세계대전의 첫 세기에 살았다
아침에 나는 그럭저럭 미쳐버리곤 했다.
신문이 무책임한 이야기를 담아 오고
수많은 기계에서 뉴스가 쏟아져 나오다가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물건을 파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다른 기계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도 똑같은 이유로 그럭저럭 미쳐버렸다
천천히 나는 펜과 종이를 들어서
보이지 않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나의 시를 쓴다
낮에는 그 사람들을 기억한다.
용감하게, 머나먼 거리를 넘어 신호를 보내고
가치를 상상하기 힘든 이름없는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사람들.
빛이 어두워지고 밤의 빛이 밝아오자
우리는 그들을 상상하고, 서로를 찾으려 한다
평화를 만들고, 사랑을 나누며, 화해하기 위해
잠으로 깨어나서 우리 서로와 함께
우리와 우리. 우리는 어떻게든
우리의 한계에 닿으려 한다, 자신을 넘어서려고 한다
수단을 버리려고 한다, 깨어나려 한다.
나는 이 전쟁의 첫 세기에 살았다.
여러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비자이 프라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