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벨트와 망가진 도로의 나라(2024년 30호 뉴스레터)

* 본 기사는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의 “The Country of the Rust Belt and the Broken Road: The Thirtieth Newsletter (2024)”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심태은(번역팀, ISC)

호세 클레멘테 오로즈코(Mexico), 미국 문명의 대서사, 1932~1934

안녕하세요.

트라이컨티넨탈: 사회연구소에서 인사드립니다.

2017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대학살’이라는 강력한 말로 미국이 처한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이 연설이 있기 76년 전인 1941년에 헨리 루스는 라이프지에 ‘미국의 세기’와 미국이 ‘무한히 확장하는 기업 영역의 다이내믹한 중심’이 되리라는 전망을 담은 을 썼습니다. 이 두 개의 선언 사이에 미국은 이른바 ‘황금기’라는 엄청난 확장과 믿기지 않을 정도의 쇠락을 경험했습니다.

이 쇠락이라는 주제가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캠페인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트럼프는 7월 19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통해 ‘우리는 다른 나라가 미국에 와서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우리나라를 약탈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트럼프의 말은 2017년 취임 연설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당시에 그는 ‘우리는 다른 나라의 배를 불려주었지만, 우리나라의 부, 힘, 자신감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죠.

7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미국의 세기’라는 위대한 모습에서 ‘미국의 대학살’이라는 처참한 현재로 추락했습니다. 이 ‘대학살’이라고 트럼프가 말한 것은 경제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 영역도 해당합니다. 트럼프의 암살 미수는 조 바이든 현 미국 대통령이 결국에는 대선 후보 자리를 카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내주게 만든 민주당 내 대대적인 반란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트럼프가 11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일부 주요 ‘경합주’(미국 인구의 20% 거주)에서 우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트럼프는 통합을 말했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미국 정치인들이 ‘국가의 통합’이나 초당적 협력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자유주의와 보수 세력 간의 간극은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이들을 가르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두 정당 모두 대중에 긴축 정책을 실시하고 지배 계급의 재정적 안정을 확보하려 하는 극단적 중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도와 방향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일부 국내 정치(낙태권 등 주요 이슈)는 이런 차이를 드러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로버트 과스미(미국), 화창한 남부, 1944

미국 정부 문서에서 나오는 각종 보고서와 소문을 통해 현재 파괴되고 있는 사회적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립니다. 보안관과 채권 회수 용역들이 소위 채무 불이행자를 찾아다니면서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가압류와 퇴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이 굶지 않으려고 신용카드와 사채라는 어둠의 세계에 발을 담그면서 개인 부채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제3 공황은 저임금 서비스 노동자의 복지를 더 없앴습니다. 이런 서비스 노동자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런 상황에 더 취약합니다. 이전의 경제 불황 시기에 서비스 부문에 종사하던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심장으로 가족을 유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사랑의 접착제마저도 사라졌습니다.

헥토르 이폴리트(아이티), 마리네 1세, 1944~1946

7월 18일에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미국에 관한 직원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빈곤율은 ‘2022년에 4.6퍼센트 포인트 올랐으며, 아동 빈곤율은 두 배 이상’ 늘었습니다. IMF는 이런 아동 빈곤율의 증가가 ‘팬데믹 시기 지원의 종료가 직접적 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 운영은 실패하고 군비 지출은 늘리는 미국 내 그 어느 정부도 수백만 가구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생활 환경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지 않습니다. 이 보고서의 한 문단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리볼빙 신용의 채무 불이행이 증가하는 것에서 저소득 가구의 압박이 증가하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게다가 주택 비용의 상승은 주거지에 대한 접근권을 심각하게 악화했는데, 특히 저소득층과 젊은 세대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홈리스(주거 상실 - 옮긴이)를 경험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수치는 2007년 데이터를 집계한 이래로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미국의 수많은 지역이 이제는 황량해졌습니다. 버려진 공장에는 제비가 둥지를 틀었고, 오래된 농가는 메스암페타민 제조장이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농촌의 꿈에는 슬픔이 서려 있고, 아이오와주 농민의 고통은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소농의 고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전에 대규모 산업 생산이나 농업 부문에 고용되었던 이들은 이제 미국의 자본 축적 주기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고, 일회용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중국이 2013년에 전 세계에서 인프라를 개선하겠다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BRI)를 만들었을 때, 미국은 녹슨 벨트와 망가진 도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긴축의 정치를 일삼는 미국 정치 계급은 이런 추락을 유보하기는커녕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긴축 정책은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파괴하며 사회적 삶을 잡아먹었습니다. 수십 년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정당은 자기의 역사적 전통을 약화하고 서로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변기의 물이 회오리치며 하수도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지배 계급의 정당들은 앞다투어 극단적 중도로 달려가 긴축을 옹호하고 기업가 정신과 성장을 자극한다는 미명하에 부를 위로 분배하는 터무니없는 짓을 용인하고 있습니다.

유럽이든 북미든 간에, 오늘날 극단적인 중도는 북반구에서 여러 문제에 발목이 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그 정당성을 잃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30년 전이라면 그럭저럭 괜찮게 여겨졌던 소위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추악한 제안(세금 감면, 군비 지출 증대 등)을 이제는 무의미하다고 느낍니다. 정치 계급은 정체된 성장과 퇴락한 인프라에 대해 효과적인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미국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치적으로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국경 수비 강화, 무역 전쟁 심화 등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투자를 마법처럼 만들 수 있다고 하는 트럼프의 해법은 사실 그의 경쟁자들이 하는 말만큼 공허합니다. 생산 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일련의 법(인플레이션 감축법, 반도체 생산 지원법[CHIPS],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 법 등)을 제정했음에도, 미국 정부는 필수고정자본형성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간극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부채 외에도 미국 인프라에 투자할 수 있는 곳은 더 있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은행도 미국이 급격히 발전하는 중국 경제로부터 쉽게 연결을 끊을(디링크) 가능성을 의심합니다.

모이세스 베세라(온두라스), 투쟁합시다, 1971

트럼프나 유럽의 여러 우파 지도자가 이끄는 이런 정치적 경향성을 설명하려고 ‘파시즘’이라는 말을 쓰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트럼프를 비롯한 이들이 민주적 제도/기관을 아주 편하게 여기는 특수한 유형의 극우 세력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므로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런 극우 세력은 자기 나라의 쇠락에 따른 분노에 어필하고, 적어도 한 세대 동안 ‘배제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애국심이라는 위대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적 수사를 꿰뚫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특수한 유형의 극우 세력 지도자들은 국가의 쇠락을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이주 노동자 계급과 각국에서 새롭게 나타난 문화 형태(특히 젠더와 인종 평등, 성적 해방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의 증가)를 탓합니다. 이런 극우 세력에서는 현재의 쇠락을 반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제시할 새로운 프로젝트가 없기 때문에 극단적인 중도만큼 열정을 갖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합니다.

한편, 극단적 중도와 결별할 능력이 없고 힘이 고갈된 자유주의 세력은 극우보다는 자기들이 낫다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극단적 중도의 양쪽으로 정치적 삶을 축소해 버리는 잘못된 선택입니다. 이런 대학살에 진정으로 결별을 고해야 합니다. 특수한 유형의 극우 세력이든 자유주의 세력이든, 결별할 능력을 주지는 못합니다.

안젤리나 쿠익 익스타메르(과테말라), 마야 시장, 2014

1942년에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역사 속에서 기업이 망해 문을 닫는 일련의 경기 침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폐허의 자리에서 ‘창조적 파괴’를 통해 불사조가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파괴’로 새로운 기업이 생기고 일자리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 파괴가 일으킨 대학살은 사회주의로 정치를 전환할 기회가 됩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행진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젊은이가 이런 가능성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1968년에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자신이 죽기 전날 밤에 ‘어둠이 아주 깊어야 별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두운 것 같습니다. 올해나 다음, 혹은 그다음 대선은 아닐지라도, 곧 선택지는 좁아질 것이고, 이미 정당성을 잃은 극단적 중도는 사라질 것이며,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소수만 부유하게 만드는 데 북반구의 사회적 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 쓰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싹틀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별을 보고 있고, 우리의 손은 그 별을 잡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비자이 프라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