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번역] 서서히 죽어가는 대학 2부
교수들이 관리자가 되자 학생들도 소비자로 변화했다. 대학들은 수익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차례로 진흙탕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고객들이 문 안으로 안전하게 진입하면, 교수들을 압박해서 학생들이 떨어져 나가 등록금이 손실되지 않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죽음이 의료진의 책임이 되는 병원처럼, 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면 교수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대학들이 학생들의 지갑을 쫓아다님으로서 나타나는 결과가 최근 20대에게 유행하는 모든 것들이 대학의 과목으로 개설되는 현상이다. 내가 가르치는 영어과에 예를 들면, 빅토리아 시대의 작품 보다 뱀파이어가, 소설가 메리 셜리 보다 섹슈얼리티가, 미셜 푸코 보다 팬 잡지가, 중세시대보다 현대 시대가 과목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뿌리 깊은 정치경제적 세력이 수업계획서로 만들어진다. 앵글로 색슨 문학이나 18세기 문학에 힘을 쏟는 영어학과는 자멸하게 되어 있다. 현재 학생들의 등록금에 굶주린 영국 대학들은 어디에서 발급했는지도 알 수 없는 학사 학위를 가진 학생들이 대학원 과정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한편, (대체로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내야 하는) 국제학생들은 언어 구사력이 딸려도 박사과정을 시작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통속적인 미국식을 추구하면서 창조적인 글쓰기를 경시했던 영어학과들은 피천(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자: 역자주)의 잠재력을 가진 무리들을 끌어들여 완벽하게 벗겨 먹기 위해 현재 2류 소설가나 실패한 시인들을 고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나, 한물간 런던의 출판사에서 첫 번째 소설이나 시를 발표할 수 있는 기회는 거대한 딱정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을 자각할 기회보다 적을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교육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그렇다고 교육을 신자본주의의 휴게소로 생각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회의 거대한 요구와 보다 효과적으로 씨름하고 있다는 것은 이 전반적인 배움의 소외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중세 대학은 보다 넓은 사회를 위해 대단히 훌륭하게 봉사하면서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지 않는 모든 형태의 지적 활동을 억누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나 국가가 지속될 수 있도록 행정가와 신학자, 변호사, 성직자들을 배출해 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 영국정부에 따르면 현재 공적으로 기금을 받는 모든 연구기관들은 스스로 사회에 측정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소위 지식 경제로 스스로 생각한다. 그와 같은 영향력은 고대 역사가들보다 항공 기술자를 가려내기가 훨씬 쉽다. 이런 게임에서는 약사들이 현상학자들보다 역할을 더 잘 수행한다. 민간 기업에게서 수익성 좋은 연구자금을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소수의 학생들만 몰리는 주제들은 만성 위기의 상태로 빠진다. 학문적 가치는 교육받은 학생은 고용할만한 인재로 재규정되는 한편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지와 등치된다. 고문서학자나 화폐수집가가 되기에 좋은 시절이 아니다. 철자에 맞게 쓸 수도 없게 되고 이러한 것은 혼자 연습하는 시기가 곧 오게 된다. 인문학의 이러한 부수 효과들은 중등과정 전반의 교육시스템을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현대어는 급속하게 하락하고 있지만, 역사는 실제 현대역사를 배우고 있고, 고전 수업은 이튼 대학과 같은 사립 기관에서만 가르친다. (따라서 이튼 학교 졸업생이자 런던시장이었던 보리슨 존슨은 통상 대중연설에서 호라티우스(로마시인: 역자주)의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철학자들은 거리 곳곳에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상담을 하고 통역이 필요한 전략적 대중 공간에서는 현대 언어학자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개 대학들은 기업 활동의 보조자로 행동함으로서 그 존재의 정당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한 정부 보고서가 소름이 이는 표현을 했는데, 대학들이 “자문 기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텔을 운영하고 콘서트나 스포츠 행사를 주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시설을 갖추는 등 대학들이 스스로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된지 오래다.
영국 인문학의 가지들이 시들고 있다면, 이는 인문학이 재원에 굶주리는 한편, 동시에 자본주의적 힘에 의해 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고등교육은 미국의 기부 문화가 부족한데 이는 미국이 영국보다 백만장자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과 달리 고등교육은 전통적으로 사고 팔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 오늘날 영국 대학생들 대다수는 고등교육은 스코틀랜드처럼 무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의견에는 일정정도 자신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긴 하지만, 그만큼 그 주장의 정당한 것도 사실이다. 후대에 대한 교육은 연쇄살인범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익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 자신이 국가 장학금을 받으면서 캠브리지 대학에서 7년을 공부했다. 표현할 수 있는 나이에 국가에 맹목적으로 의존한 결과 내가 줏대 없고 의기소침하게 자라나, 스스로 두 발로 서거나, 부름을 받더라도 총을 들고 가족을 보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겁하게 국가에 의지하면서 때때로 두터운 손으로 화염과 싸우지는 않았지만, 소방서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7년간 공짜로 캠브리지를 다니기 위해 일정 정도의 남성적 독립성을 기꺼이 거래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영국 전체 인구의 5%만이 대학을 다녔지만, 오늘날 그 수치가 약 50%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정신적 여유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독일은 상당한 학생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한다. 젊은 세대들의 어깨에 지워진 엄청난 부채를 덜어주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영국정부도 터무니없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높이고 매년 어설프게 잃어버리는 수십억을 되찾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주류 사상이 철저한 검토를 통해 제출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영역으로 대학의 영광스런 혈통을 회복해야 한다. 인문학의 가치는 지배적인 개념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니라 확인하지 않는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닐까? 통합을 하는데서 그와 같은 가치는 없다. 근대 시대에 예술가들은 현대사회보다 전체적으로 사회에 훨씬 더 결합되어 있었지만, 이때의 예술가들이 주로 이론가이거나 특정 정치 세력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시대의 대변자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반대로 현대의 예술가들은 사회 질서에서 안정적 위치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당연하게 생각되는 시대에 대한 충실함을 거부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보다 나은 시스템이 등장할 때까지 나 자신은 연민조차 없는 속물이나 무신경한 유용함의 공급업자라는 내 운명을 던져버릴 결심을 했다. 다소 부끄럽지만, 학기 초에 내 수업을 받는 대학원생들에게 문학작품에 대한 나의 빛나는 통찰력에 지불할 것인지, 일정 서비스지만 그다지 빛나지 않는 코멘트로 해 나가야 할지를 물었다.
통찰에 대해 값을 매긴다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고, 아마도 자신의 학생들과 원만한 관계를 쌓는데 가장 효과적이지 않은 방법일 수 있다. 이것이 학생들 사이에 부당한 구분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가장 통찰력 있는 분석에 대해 현금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도 거래에 참여하는 것은 자유라는 사실을 짚어야 한다. 갓 구워낸 파이나 집에서 만든 맥주 통, 손으로 뜨개질 한 스웨터, 흑맥주, 수제 신발 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결국 인생에는 돈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
번역: 김혜숙(대표, I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