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과 아시아] 필리핀: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시위대가 거리에서 아키노 전대통령의 모형을 끌고 가고 있다. (출처: Philippine Star)5월 9일 5,400만 필리핀 국민 중 1,600만이 로드리고 로아 두테르테를 필리핀 대통령으로 뽑았다. 두테르테는 민다나오 다바오시에서 시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동시에 다바오시 무법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다바오 암살단과 관계가 있다고 의심을 받아 의심쩍은 인권기록으로도 알려졌다. 필리핀 국회 대표인 월든 벨로는 국민이 두테르테에게 표를 던진 것은 1986년 EDSA[1]민중혁명이 세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정부를 거부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월든 벨로[2]는 두테르테가 많은 유권자에게 인기 있는 이유는 마르코스 독재 정권[3]에 맞서 싸우면서 나타난 인권의 가치와 1987년 헌법에서 제정한 적법 절차를 비웃으며 일축하기 때문이라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말한다. 계엄령 최고 암흑기 동안 수 천명이 고문 당하고, 살해당하고, 실종되어도, 수백만명의 필리핀 국민은 조용하지만 용감하게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조직했다. 학생, 농민, 원주민, 노동자, 도시 빈민, 전문가, 그리고 사업가까지 정의와 자유를 위한 단일 전선을 지지했다.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가 1983년 8월 21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접고 돌아왔지만 암살당하면서 조용한 투쟁의 불은 거세졌다. 1986년 2월 26일 수백만 명이 국민이 거리로 몰려나와 마르코스가 물러나기를 요구하자 그는 하와이로 피신했다. 니노이 아키노의 미망인 코라손 “코리” 아키노는 EDSA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 피노이 아키노의 무능한 정부가 국민의 엄청난 불만과 분노를 불러일으켜1986년부터 집권해온 자유주의적 민주정부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필리핀 신자유주의 빈곤의 지옥으로 떨어지다
1950년대 세계은행은 필리핀을 동아시아 최고 경제국이자 장기적으로 가장 유망한 국가로 보았다. 교육, 교통, 공장에 비교적 높은 수준의 지출을 하면서 필리핀은 일본[4]에 이어 극동에서 2위를 차지했다. 마르코스 독재정권 하에서 필리핀은 세계은행의 관세를 낮추고, 규제를 완화하고, 공기업[5]을 민영화하는 새로운 구조조정 프로그램 실험대상이 되었다. 필리핀 국민은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빈곤과 굶주림으로 서서히 떨어졌다. 하지만 필리핀의 대다수는 마르코스가 집권하고 나서야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과 같은 신자유주의 기구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EDSA 민중혁명에 대해 많은 국제적인 지지를 활용해 독재정권 하에서 생긴 부채를 낮추기 위해 협상하기 보다는 코리 아키노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미국 은행의 압력에 고개를 숙였고 외채 상환을 국정의 최우선 순위로 두었다. 1986년부터 부채상환이 국가 예산의 20~45%까지를 차지해 국민은 기본적인 사회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고 국가투자능력도 심하게 손상되었다.[6]코라손 아키노 정부는 마르코스 정부가 특정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수출 통제를 철폐했고 그리하여 식민지의 자유무역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대통령인 피델 V. 라모스 집권기에 필리핀이 서둘러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GATT)에 들어가고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하면서 자유화가 절정에 달했다. 라모스는 임기동안 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보다도 빠르게 관세 수준을 일방적으로 낮추었다. 라모스는 국제통화기금이 그렇게도 원했던 “제약없는 외환체제”를 완전히 이루었다. 통화 통제 없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필리핀 페소는 1달러당 26페소에서 56페소로 가치절하되었다. 현재는 1달러당 47페소로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다. 라모스는 저돌적으로 자유화를 추진했을뿐만 아니라 국민을 위한 안전망을 만들지도 않았다. 라모스 이후 대통령들도 자유무역과 세계화라는 길을 계속 이어갔다. 비리로 탄핵된 에스트라다 정부는 토지 소유와 국가 유산에 대한 권리를 국민이 보유하는 국수주의적 조항을 제거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 했다.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는 절대적인 자유무역정권을 약속했다.
도시의 가난한 청년인 조니는 마닐라의 다갓다가탄에서 C-3 다리 넘어 무허가 정착민의 판잣집을 보며 그의 미래를 빼앗겼다고 여긴다. 이 다리 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Bernard Miralles 사진)
베니그노 아키노 3세 정부: 약속한 곧은 길이 삐뚤어지다
베니그노 아키노 3세(피노이 아키노)는 2010년 선출되어 부패가 없는 “곧은 길”을 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아키노 3세는 대법원이 헌법위반이라고 판결한 개발촉진프로그램을 통한 자금횡령에 연루되었다. 아키노 정부는 6.3% GDP 성장을 이뤄냈지만 빈민은 전혀 혜택을 보지 못했다. 2015년 상반기 필리핀 국민의 26.3% (26,480,000명)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빈곤선은 기본 필수품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저 소득을 말한다. 필리핀 국민의 12.1%(12,180,000명)가 극빈층에 속한다. 이들은 하루에 세 끼조차도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노 아키노 정부가 민다나오의 키다파완에서 배고픔에 쌀을 요구하는 농민들을 “교통을 방해”했다며 쏘아 3명이 죽고 13명이 부상당한 것을 기억한다. 이 참사는 코리 아키노 대통령이 포괄적농업개혁프로그램(CARP)을 실패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농민과 시민단체가 CARPER(CARP확장과 개혁) 하에서 토지개혁프로그램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지만 피노는정치적 의지도관심도 없어 수렁에 빠졌다. CARPER 끝까지 70만 헥타르의 최상의 개인 토지는 지주 소유로 남았고, 토지개혁 수혜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흔했으며, 농촌 빈곤은 극심했다. 또한 아키노는 2015년 1월 모로 반란으로 44명의 특공대원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군대 최고사령관으로서 아키노는 모로 영토 내의 미국 고가치표적을 체표하는 위험한 작전을 승인했을 때는 악명높은 마마스파가노 학살에 지휘책임은 그에게 있다. 이후 44명의 국가영웅의 시신이 전장에서 돌아돌 때 아키노는 가보지도 않고 해외자동차회사공장 개장식에 참가했다. 필리핀 국민에게 그는 공감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키노는 많은 이들이 민다나오에서 무슬림 소수자의 자치권을 위한 수십년간의 투쟁을 끝낼 것이라고 바랐던 방사모로기본법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마마사파노 학살과 방사모로기본법의 합헌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임기내에 통과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아키노는 필리핀의 주류 좌파인 신인민군(NPA)과 필리핀공산당(CPP)과 평화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필리핀 전역에서 범죄는 늘고 다수가 거리에서 위험을 느꼈다. 마약 문제는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불안은 가중되었다. 2012년 약 130만명이 마약을 했다. 마닐라에서 노동자 수십만명은 매일 1km의 줄을 서서 정어리처럼 전철(MRT)을 타기 위해 몸을 구겨넣었다. 자주 운이 안좋은 날이면 전철이 고장나 전철 관리 입찰에 대한 의심이 늘었다. 출퇴근 노동자들이 버스를 타면 고문과 같은 교통체증을 견뎌야 하고 지각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인듣고자 했다면 괴로워하는 국민들이 아키노와 정부에게 쏟아내는 욕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테르떼가 대선 캠패인을 할 때 공감과 변화라는 구호로 정부를 욕하며 활보할 때 수백만의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두테르테 정부: 변화는 진정 오는가?
“진실한 사람”. 이 말은 로드리고 로아 두테르테를 생각하는 말이다. 캠페인 기간동안 두테르테는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주요 공약은 변화와 빈곤 근절이었다. 두테르테는 2016년 6월 30일 대통령직을 시작했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신뢰를 받았다. 그리하여 두테르테는 약속한 진정한 변화를 만들 기회를 받았지만 불확실성도 존재한다. “두테르테는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 변화가 어떤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다투 디무에이 언새드는 말한다. 민다나오가 선조의 영토임을 주장하는 원주민인 티무에이 족장이다.
모순의 정부
여성주의 노동운동 지도자인 유엔 아바나는 두테르테 정부가 발표한 것에는 많은 모순이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두테르테 내각에는 상충되는 세력이 있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필리핀공산당 (CPP)이 지지한 사람이 적어도 3명[7]내각 임명을 받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피델 라모스와 가까운 군인과 대기업 대표에 비하면 소수이다. 재정정책은 기업가와 과학기술분야 전문가가 결정할 것이다. 과학기술분야 전문가는 재정, 통화, 무역 정책을 포함하는 현재 거시경제 정책을 유지하는 사회경제 10대안건을 작성했다. 이전 정부가 실시했던 신자유주의정책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두테르테 정부는 어떻게 빈곤의 고리를 부순다는 것인가? 두테르테 정부의 진보주의자들은 그들이 바라는 변화를 시행할 때 큰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농민이자 필리핀 농민운동 의장인 파엥 마리아노는 내각에서 농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진정한 농업개혁법안을 제안하지 않는다면 현재 농업개혁법에 얽매일 것이다. 지주와 엘리트가 입법 기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진정한 농업 개혁 법안이 통과되겠는가? 필리핀 국민은 오로지 두테르테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친농민적인 농업개혁법안이 입법부에서 통과되기를 바랄 수 밖에 없다.
“마약과의 전쟁에서” 인권침해
두테르테는 대선 공약에서 인권과 적법절차를 고려하지 않고 마약 거래와 마약 사용을 추적하겠다고 했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직을 시작하기 전에도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로날드 장군 지휘하에 필리핀 경찰은 저소득층 지역을 무차별 포격 지대로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500여명이 집중적인 마약퇴치작전으로 목숨을 잃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경찰이 모든 살상에 대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둑이나 날치기 등과 같이 경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자경단의 징후가 보인다. 사법 절차를 따르지 않는 처형에 대한 대응으로 시민 사회 단체가 모여 인권을위한시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두테르테의 국정 연설이 있는 날 위원회는 결집해서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일상적인 유혈사태가 필리핀을 마약과 범죄를 빠르고 더럽게 처리하는 대통령의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 방식을 불법적이고, 부도덕하고,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양극화시키고 있다고 제기한다. 인권을위한시민위원회는 지도자와 지지자 간의 위험한 시너지가 존재하며 인권과 적접 절차를 부인하고 조롱하는 것이 정상인 것으로 만든다고 지적한다. 위원회는 두테르테 대통령이 사법 절차를 따르지 않는 처형을 중단할 것을 명하고 법치주의를 복구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또한 두테르테는 필리핀을 독자적인 경찰력과 자경단이 처벌받지 않고 활보하는 거대한 킬링필드로 만드는 선동적인 수사법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또한 시민들에게는 인권과 법치주의, 적법 절차의 보편성과 불가침성에 대해 나서서 목소리를 내주기를 요청했다[8]. 위원회의 수천명이 모여 두테르테 정부 하에서 처형 근절을 요구하는 동안 필리핀공산당과 연계가 있는 바얀 공동체에서 5,000명의 시위대는 그들만의 변화를 위한 의제를 보여주기 위해 “평화의 초상화” 벽화를 그리며 행진했다. 시위대는 처음으로 국정연설을 하는 동안 국회 근처를 행진할 수 있었다. 국정 연설이 끝나고 두테르테는 바얀 공동체 지도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권주의자들은 두테르테가 국정연설을 하는 동안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처형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Judy Pasimio)
과제: 결국 두테르테는 평화를 가져올 것인가?
마약 거래와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반면 두테르테는 모로 반란 단체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평화의 손을 내밀고 있다. 모로 사람들은 민다나오에서 자치를 위해 수십년동안 싸워왔다. 그들은 두테르테가 민다나오 사람으로 상황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방사모로기본법을 통과시켜 지속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테르테는 연방제도가 모로가 원하는 자치권을 줄 것이라고 제안하고 방사모로기본법 통과를 지지하고 있다. 다투 언세드는 두테르테가 원주민들이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과 필리핀 공산당의 평화 패널에 대표자를 둘 것이라고 말한다. 원주민들은 이 협상에 이해관계가 있다. 이유는 모로가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부분의 일부에 대해 주장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군인과 모로나 공산주의자인 반군 간의 총격전에 연루되었다. 두테르테의 영향력으로 1960년대에 시작된 공산주의자 반란을 끝낼 것으로 전망한다. 두테르테는 빈곤과의 전쟁을 벌이고 필리핀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외세 지배를 종식시키려는 필리핀 공산당, 신인민군, 국가민주주의전선과 정지되었던 평화 회담 재개 공약을 지켰다. 두테르테는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고, 공산주의자가 추천한 지도자를 그의 내각에 임명한 것은 긍정적인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두테르테는 국정연설을 하는 동안 신인민군과의 휴전을 선언했다. 두테르테 정부와 공산주의자들과 합점을 찾아 공산주의자가 무기를 내려 놓을 수 있는지는 지켜봐야 한다.
필리핀의 미군 주둔
두테르테 앞에 놓인 또다른 중요한 문제는 필리핀에서 미군 주둔 확정을 허용할 것인가이다. 필리핀 상원은 1991년 필리핀 미군기지를 허용한 조약 개정을 거부했다. 미국과의 외국군 방문협정은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허용했다. 피노이 아키노는 10년 기간동안 미국이 구조물을 짓고, 무기와 방어 보급품을 보관하고, 군대, 군무원, 용병을 주둔시키고, 차량, 선박, 항공기를 배치하고 수송할 수 있도록 하는 방위협력확대협정에 서명했다. 대법원에서 방위협력확대협정의 적법성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국수주의적 시도는 유효한 행정 협정으로 규정되어 패했다. 필리핀 국수주의자에게 방위협력확대협정은 현재 미군 기지 상태를 허용하는 것이다. 로날드 심불란 교수는 미정부가 2013년 민다나오에서 드론 작전을 위해 다바오시에 미군기지 설립을 요구했지만 거절했던 일을 말한다. 로날드는 두테르테가 방위협력확대협정을 검토하고 폐지하기를 바란다[8]. 남중국해의 긴장은 고조되고 필리핀은 여러 군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과 관계있는 두테르테 외교 정책은 필리핀과 아시아에 모두 상당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두테르테는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지키려고 한다. 이는 남중국해의 통제권을 왜곡시키는 강대국의 졸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필리핀 국민은 국가와 자원에 대한 통제권과 권력을 다시 가지길 바래왔다. 1986년 수백만명이 EDSA 민중혁명에 함게하면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변화가 빈곤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다는 희망이 높다. 30년 간의 EDSA 공화국 후에 희망은 깨지고 독재정권의 그림자와 EDSA 민중혁명만이 기억된다. 독재 정권의 암흑기에도 싸워온 EDSA를 부인해 많은 사람들이 인권과 적법절차의 가치를 포기할 준비가 된 것 같다. 평화와 번영에 이르는 다른 길을 가볼 권리가 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변화를 이끌도록 의존해서는 안된다. 필리핀 국민은 외세의 지배가 없는 변화로 이끄는 지도자가 가진 권력을 재발견해야 한다.
메르시 L. 엔젤레스
메르시 L. 엔젤레스는 군정시절 로스 바노스의 필리핀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다. EDSA 민중 혁명 후에 시민단체에서 조직 발전과 사업 개발에 대한 교육자와 상담가로 일했다. 현재는 인권과 여성 권리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번역: 황정은(사무국장, ISC)
** 본 글은 국제전략센터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EDSA는 Epifanio Delos Santos Avenue라는 도로 명으로 1986년 2월 22-25일 2백만명이 모여 마르코스의 하야를 요구했다 마르코스는 1986년 하와이로 도피한다.
- 월든 벨로는 사임하기 전에 베니고 “피노이” 아키노 3세의 “곧은 길” 연합의 멤버였다.
- Walden Bello, Requiem for the EDSA Republic at http://interaksyon.com/article/129284/op-ed--requiem-for-the-edsa-republic
- Alejandro Lichauco, Hunger, Corruption and Betrayal: A Primer on US Neocolonialism and the Philippine Crisis, 는 2009년 Popular Bookstore가 저자의 허가를 받아 재판했다.
- Ibid, Bello.
- Ibid, Bello
- 그들은 사회복지와 개발, 농업 개혁, 노동 분야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End Impunity. Stand Up For Human Rights. Uphold Due Process. Statement by the Citizens’ Council for Human Rights 두테르테 국정연설에 맞춰 발간됨
- Roland Simbulan, Toward an Independent Philippine Foreign Policy: Is Change Coming ? 두테르테 관련 포럼 보고서로 발간됨. 필리핀-딜리만 대학의 Center for People Empowerment in Governance이 주최함. 2016년 7월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