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주의 좌파의 위기] 브라질의 위기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글: 페데리코 푸엔테스(쇼셜리스트리뉴얼 저널, 링크스 부편집장)
번역: 이주희(번역팀, 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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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4일, 노동자당 대표 지우마 호세프는 대선 결선에서 5천만이 넘는 표를 획득해 52%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2016년 4월, 한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이 12%까지 하락해 의회에서 지호세프 대통령 탄핵을 시작하였고, 몇 달 후 대통령은 국회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호세프 대통령의 운명은 몇 달 이내로 재판과 상원의 투표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브라질 인구는 라틴아메리카 총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GDP 또한 세계 6위로 주변 국가보다 월등히 높다. 1971년 리차드 닉슨이 언급했듯이  “브라질이 간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도 따라 갈 것이다.”

어떻게 대선에서 4번이나 이긴 세계 좌파 세력의 빛나는 별이, 각종 비리 사건에 휩싸이고 수많은 반대 여론에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되었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흔히 그러하듯, 사태를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가설이 등장한다. 지금부터,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요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중 어느 요인 하나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 요인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이후, 노동자당 안팎에 존재하는 좌파에 대한 딜레마를 확인하며 논의를 마치려 한다. 논의 전개를 위해, 당이 창당되고 폐지된 이력을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노동자당 창당

1981에 열린 첫 전당 대회에서, 당 대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는 당이 새로운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함을 역설했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주의는, 투쟁하는 모든 민중의 실제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서 … 우리는 모두가 각 개인의 가치를 인정받고,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는 사회를 원합니다. 가능성과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어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원합니다.” 1970년대 노동조합과 반독재 투쟁 집단에서 브라질의 “새로운 좌파”를 표방한 대중 사회주의 정당이 출현하였다. 이는 브라질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모델로 자리잡았다.

투쟁에 그 뿌리를 두며  노동자당은 노동계급이 국가를 민주화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바로 선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당의 비전은 초기의 성공으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 1989년 첫 직선제에서 당 대표였던 룰라는 낙선하였으나 그 차이가 6퍼센트 이내로 근소하였고, 각 지방에서는 노동자다에서 36명이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0년간의 당의 성장에 영향을 준 주 요소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 노동조합 운동권 출신의 창당인의 능력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좌파 세력이나 사회운동 단체, 해방신학 그룹, 당내 중도세력 등 다양한 집단에 다가섰고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둘째, 당 구성이 천성적으로 민주적이었다는 데 있다. 당은 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지역 풀뿌리 단위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이 성원 중에는, 아직 특정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과, 우파이지만 부분적으로 좌파와의 합의를 원하거나 기존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자 하는 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특성은 당이 성장하는 데에 있어 주 요인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셋째는, 당 자체가 당시의 부패한 국정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만했다는 것이다. 당시 노동자당이 정치에서 내세운 윤리는, 좌파를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던 사람에게도 새로운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당의 이미지는 당이 각 지역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시행해  더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주민참여예산제처럼 공적 의사결정에 있어 지역사회의 합의가 필요한 행정에서 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노동자당의 2002년 대선 승리는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서 좌파 정치가 부상한 것과는 그 양태가 다르다. 그것은 수 년에 걸쳐서 세력이 축적되었기 때문으로(2000년도에는 노동자당 출신 시장이 187명에 달했다), 기존 정치 세력이 한 순간에 위기에 빠졌다거나, 투쟁의 무리가 갑자기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1992년 거리 동원으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가 사임했을 때부터, 거리 정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서부터 21세기의 초까지를 풍미하는 대통령은 거의 없었다는 페르난두 엔히키 카르도주의 법칙에 무색하게, 룰라의 세력은 중임 기간까지 해서 총 8년간 지속되었다.

룰라 정부

룰라는 첫 번째 대선에서 46.4%의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2002년에는 60%의 지지율로 재선되었다.

국제적으로, 룰라와 호세프 정권 하의 브라질은 좀더 진보적인 좌파 정부에 힘을 보태고, 미주자유무역협정(FTAA)과 같이 국내외에 존재하는 미국의 패권에 대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오랜 역할을 벗어 던지고, 브라질은 브라질만의 독립적인 정책을 고수해 가기 시작했다.

우고 차베스, 에보 모랄레스와 라파엘 꼬레아와는 달리 룰라와 호세프는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사실, 2002년 대선에서 룰라는 선거운동 물품에 빨간 별이나 “사회주의자”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부호 경영자인 조제 알렝카르를 부통령으로 기용하였고, 투자자에게는 국가 금융 수주나 이행 등의 경제행위를 존중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정권을 잡는 것은 먼 꿈이 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비용을 치러서든지 대선에서 이기고 주도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당의 정책은 전혀 획기적이지 않았다. 경제 분야에서 당이 취한 전략은 이른바 (신)개발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전략의 핵심은, 초기 경제계획이나 자금조달, 그리고 자유시장 규제를 통해 국가가 더욱 광범위하게 규제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산업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비자 대출 증가와 함께 사회 보장 제도는 단순히 가난을 줄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는 개발주의가 지향하는 중요한 요소인, 내수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전략에 도시빈민(서브-프롤레타리아)과 산업 자본가에 속하는 노동계급이 지지를 보냈다. 룰라가 재임하였던 2002년~2008년 동안, 세계적으로 국산품 소비 붐이 일어난 덕분에 이 전략은 성공하였고 브라질은 득을 보게 되었다.

21세기 첫 10년간, 이 경제 전략을 통해 하위 20% 계층의 수입 증가율이 6.3%로 상위 20%의 수입 증가율(1.7%)보다 더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상위 1%의 부 또한 하위 계층의 수입 증가율보다  더 많이 증가하였다.

2011년, 브라질 경제학자 파울로 키우아스는 이 현상에 대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룰라 임기 8년동안  연방 예산이 금융권과 엘리트에게 이동한 것은, 부채에 대한 이자지급 형식으로 일어났고 이에 추산되는 총 달러가치는 600억에 달한다. 이는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에 할당된 자원의 1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자본이 큰 경제 주체에 집중되면서 자본으로부터 불로소득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경제 전반에 걸쳐서 은행이나 다른 금융권의 동결 조치를 더욱 부채질한 것이다.

지우마 호세프 정부

당시 정부의 개발주의 모델은 한계점에 봉착하여 경제가 탈산업화 경향까지 보이기 시작했고, 전지구적 경제 위기가 브라질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호세프는 은행을 중심으로 이 사태를 전환해 보고자 하였다. 당시,  채무자는 채권자에게 같은 돈의 비용으로 5배에서 20배 정도를 지불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은행의 예치금액과 대출액의 격차가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첫 번째 단계로, 정부는  가장 높은 장기이자제도 중 하나에 손을 대기로 하였다.정부는 금리를 큰 폭으로 인하하고, 전력 분야의 관세를 인상하였으며, 새로운 자본 규제책을 마련하고 자본을 실제보다 평가절하하였다. 그리고, 국영 개발 은행인 BNES를 필두로 한 새로운 산업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초기에 경영자는 저금리의 직접적인 혜택을 입으며 이 같은 사회 흐름에 열성적으로 동참하였다. 하지만 곧 그들은 호세프대통령을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자본 세력과 손을 잡았다. 2013년 6월 수백 수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부패와 부적절한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다. 이 사람들은 브라질 경영자들을 대변하는 주요 기관인 상파울루o 고용주 연합으로, 반정부 인사들에게 시위 깃발을 나누어주었다.

2014 대선 결선에서, 호세프는 대선 구도를 양극화할 목적으로 좌편향을 강력히 고수하였다. 그리고 상대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은 곧 긴축 정책에 투표하는 것이요, 이는 곧 신자유주의의 영원한 암흑기로 귀결하고 말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이 반-신자유주의 담론을 통해 그녀는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호세프는 대선 운동에서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기존의 수많은 긴축 정책을 자신의 정부에서 그대로 시행하겠노라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 여기에는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브라질 경제학자 길례르미 멜루는, 경제 영역의 고수익성이 보장되던 몇 년간, 산업 영역에서 수익을 거둬들이기 위해 경제 영역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전자와 후자 간의 이해관계가 밀접히 뒤얽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은행의 타격은 곧 산업 자본가들의 중요한 영역에 대한 타격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루이 브라가는, 산업 자본가가 호세프를 규탄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 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논한다. 특히 그는 호세프 정부 하에서 파업 횟수가 늘어난 것을 지적한다. 2008년부터 파업은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2012년에는 그 횟수가 873번, 노동시간으로는 87000시간에 달했고, 이후 2013년에는 2000년 때보다 조금 넘는 횟수를 기록했다. 노동자당이 이러한 불안정을 해소하지 못하지 많은 자본가를 불편하게 하였다.

사회과학자인 뤼즈 카를로스 브레세르-페라이라가 세 번째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호세프에 대한 산업자본의 불신이 생겨난 요인으로, 자본가 집단에서 언론을 조작하여 강력한 반국가적 움직임을 시작한 것을 꼽는다. 그들은 정부의 무능하고 권위주의적인 태도와 부정부패를 비난해 호세프의 개발주의 전략을 꺾을 수 있었다. 그들은, 호세프 대통평 재임 기간 동안 브라질의 경제성장률과 수익률이 현격하게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증가했다는 것으로 주장을 뒷받침하였다.

경제학자 플리니우 데 아후다 삼파이우 는, 이같은 사태는 국제적인 요소가 작용한 결과라고 보았다. 삼파이우는 호세프가 수출 감소를 메우기 위해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위해 전제조건인 자본과 내적 투자에 적극 개입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본 세력에서는, 그보다는 공공자산과 사회제도의 민영화라는 새로운 조류에 기초한 정책을 원했다.

마지막으로, 정치학자 안드레스 신저는 호세프가 다양한 투쟁 전선을 동시에 열었기 때문에 호세프 정부 하에 다양한 자본의 영역과 갈등이 증가했을뿐만 아니라 “지금은 디우마가 저들 세력을 공격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그게 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계급간의 연대를 강화시켰다.

이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동자당의 사회적 기반을 수 년간에 걸쳐 잃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찍부터, 정당에 있었던 소규모 좌익세력들이 2004년의 사회보장 개혁과, 당선을 위해 반대 진영에 뇌물을 수수한 2005년의 부정부패에 반하여 당을 떠나갔다. 하지만 정당과 민심 간의 현격한 차이는 2013년 집회에서  가장 생생히 드러났다.

노동자당은 기존의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확보하고, 도시 빈민에 대한 영향력을 굳히려고 했다. 하지만, 2013년의 정치 동원을 통해, 노동자당에 반하는 사람은 한번도 노동자당을 지지해본 적이 없는 자본가나 기존 중산층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리는 신저가 이른바 ‘신프롤레타리아’라고 칭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부모가 중산층이 아니고, 일의 위험도가 높고 불안정하며,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낮은 임금을 받아가며 일하는 청년층이었다.

신프롤레타리아는 대도시 주민이 겪고 있는 여러가지 중요한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례로, 2013년 봉기의 시발점이 되었던, 비싸고도 형편없는 대중교통이 있다. 이전에는 사회복지 자체를 요구했지만, 지금은 그 복지의 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복지의 질을 높이는 큰  문제를 해결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는 결국 과세나 대출상환 제도를 개선해야만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당이 해낼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사실 원하지도 않는 방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분권적이고 자발적이고 노동자당은, 옛날 자신이 수년간 선전했던 것과 같은 것을 주장하는 사람과 씨름하고 있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다 우파들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주로 노동조합 운동과 무토지농민운동과 같은 호세프 대통령의 사회 기반으로 계속된 사회운동은 위신을 잃게 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운동의 내용이 노동자당이 이전에 주장했던 것들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각종 비리사건과 우파의 가세에 휩싸인 호세프  정부는 개발주의 모델을 계속 밀고 나가거나 아예 포기하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후자를 택했고, 기존의 정치 기반을 철회하고 반대 세력에게 약속했던 긴축 정책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에게 지지를 얻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그들은 이미 호세프 정부의 무능함과 취약함을 인지하고, 노동자당에서 패권을 빼앗아 오려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파의 딜레마

탄핵으로 우파는 선거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이루었다. 노동자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난 데에는 호세프와  노동자당에 대한 지지기반이 취약하였던 것, 여당과 뜻을 같이했던 다른 정당이 연합해  정부의 주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노선을 달리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적법하고 법에 입각한 쿠데타로 여기는 것에  반대해 일어난 정치 동원의 중요성을 희석하려는 시도 없이는, 호세프 대통령의 복귀 가능성은 적어도 지금은 희박해 보인다.

이러한 사태에 마주한 다양한 좌파의 분파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노동자당의 최우선 과제는 호세프 대통령을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복귀 없이는 쿠데타의 적법성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 될것이라 주장한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당은 광범위한 반-쿠데타 전선을 형성하겠다고 공표했다. 한편, 당 내의 좌파 세력은 노동자당의 주 세력이 이후의 선거를 염려하여 호세프를 탄핵했던 지방의 1000여 개 세력과 연합하려고 하는 행태를 비난하였다.

무토지농민 운동(MST)이나 중앙노동총연맹(CUT), 국제학생연합 (UNE) 등과 같은 브라질의 주류 사회운동 단체는 대중 브라질 전선으로 연합하여, 호세프 복귀를 촉구할 것과 관련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밖의 사회주의자유당(PSOL)이나 다른 군소 사회운동 집단에서는, 호세프 복귀 요구의 중심에는 반드시 대통령 선거에 관한 내용이나 최소한 그에 상당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의는 호세프 지지층이 약하고, 차기 대통령에 오른 테메르가 물러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도 여론이 호세프의 복귀로 인한 결과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당과 쿠데타 정당(우파정당)과 자신을 구분하면서 이후 대선 판도를 결정지을 주요 집단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상황을 감지한 호세프는 만약 대통령에 복귀하게 된다면 조기 선거를 치를 의사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미 정부 권력을 탈환한 우파가 조기 선거를 시행할 것 같지는 않았다. 우파는 계속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룰라가 도전해올 가능성에 대비해고 2018년 대선을 준비하는 편을 더 선호할 것이다.

또한 여러 분파는 무능해진 정치 제도를 철저히 해체하기 위해서 제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에 관해 국민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요구가 현재의 (불법적인) 정부를 향한 것인지 호세프의 복귀 이후를 겨냥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산발적인 많은 지원책들이 어떻게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명확치 않다.

노동자당 정부는 21세기를 이끄는 주 세력으로 올라서지는 못했다. 하지만 관련된 사건에서 노동자당이 했던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브라질의 규모와 경제력으로 보았을 때, 브라질의 보수파는 단지 라틴아메리카 좌회전을  막는 또 하나의요소만이 아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좌파 전부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브라질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논의와 앞으로 일어날 일은 좌파 세력에 있어 국제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