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의 투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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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자넷 찰스(해외통신원, 평화의 증인, 치아파스 지원 공동체)
번역 : 예선희(번역팀, ISC), 황정은(사무국장, ISC)

아이티 민중의 역사는 끊임없는 투쟁과 연대 그리고 노예제 폐지의 역사이다. 2015년과 2016년에 걸쳐 대대적인 시위 현장에서 수십만의 아이티 민중은 아이티의 크레올어로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Nou Pap Obeyi)“라는 구호를 외쳤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서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적 선거를 요구했다.

판미 라발라스당[1]의 오랜 풀뿌리 운동가 마리세 나르시스[2]박사는 대중적인 선거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지원받는 정치인이자 사업가이며, 미쉘 마텔리(Michel Martelly) 전 대통령의 정치적 후계자 조베넬 모이즈(Jovenel Moises)가 2017년 1월 3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아이티 국민들은 이 선거가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와 유엔의 국제적인 힘이 개입된 부정 선거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전 세계에 있는 운동 세력 대부분은 아이티에 인종차별 상태를 불러온 미국, 캐나다, 프랑스 주도의 국제적 점령을 잘 알지 못했고, 이에 대한 어떠한 활동도 없었다. 나르시스 박사는 지난 4월, 캘리포니아 주 오클랜드에서 있었던 연대행사에서 이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다. “아이티 안에는 두 나라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1% 와 절망적인 빈곤에 허덕이는 대다수[가난한 흑인]... 나는 여러분에게 아이티의 가난을 선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아이티가 실패한 국가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티 민중은 투쟁하고 있고, 민중의 이해에 복무하는 강력한 힘을 원합니다.”

오늘날 아이티는 수 많은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정권, 유엔 점령군, 기본 생필품 가격 상승, 수로 오염, 교육, 의료 그리고 주택과 같은 자원에 대한 접근성 차별 등.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생의 길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흑인 주도의 독립을 달성하고 흑인해방에 대한 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세계의 강대국들은 이 섬나라의 개발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고 응징을 가했다.

아이티의 개혁의 뿌리 그리고 개혁에 대한 반동
“아침, 점심, 그리고 밤이 될 때 노예들은 ‘아이티 아이티(Haitii, Haitii)[3]’라고 외쳤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노예들의 가장 큰 꿈은 식민지배 하에서의 잔혹함과 야만성에 의한 고통을 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 전 대통령,
아이티-아이티: 정신적 탈식민지화에 관한 철학적 고찰[4]

아이티 민중의 비전은 언제나 인류의 발전, 민중 민주주의와 흑인해방에 있었다. 아이티의 혁명 과정은 서반구에서 과거 노예였던 아프리카인들이 유럽 식민열강을 패퇴시킨 유일한 성공사례이다. 아이티 민중들이 반식민지화 투쟁 기조를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승리와 개혁에 대한 반동적 운동을 이해하는 것은 아이티가 처한 현재의 시급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1791년, 시슬 파티만(Cecile Fatiman)과 두티 브크만(Dutty Boukman)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적 전략을 논의하고, 그들의 조상과 영령의 안내와 보호를 기원하는 부두교 의식을 조직했다. 많은 아이티인들은 이 의식이 수 세대에 걸친 아이티의 혁명 과정과 전 세계의 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아프리카인들은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봉기를 일으켰고, 프랑스 식민 지배자들과 키스케야[5]로도 알려진 아이티(Ayiti)섬에서 이루어진 세계적인 대서양 노예무역 사업에 대항하기 위해 마룬[6] 전략을 확대했다. 수천 명의 식민주의자가 살해되었고,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농장이 불탔으며, 더 많은 노예들이 족쇄에서 풀려났다.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은 직접적인 전투와 마론,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전략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을 통해 나폴레옹 제국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1804년 1월 1일, 서반구에서 최초의 흑인국가로서 아이티가 건국된 후, 아이티는 세계의 식민주의와 노예제의 종식을 위해 연대를 확대해 갔다. 아프리카인들, 그리고 건국 후의 아이티인들은 군대, 인쇄기, 선박, 무기, 보급품, 전략 훈련 등을 혁명 세력에 제공했다. 미국 내의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에서부터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가 이끄는 베네수엘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아이티로부터 중요한 지원을 받았다.

아이티의 흑인들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탄압받는 민중이 처한 조건들을 변혁하려고 한 아이티의 혁명 프로세스로 인해, 아이티는 반개혁적인 결과의 물결에 부딪혔다. 캐나다부터 유엔 및 국제 금융 기관과 같은 국제기구의 지원과 함께 미국과 프랑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점령, 착취, 강탈을 통해 아이티를 미개발국가로 머물게 조장했다.

1825년, 프랑스 왕정은 새롭게 탄생한 아이티 공화국에 인적 재산과 한때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던 사탕수수 산업에서 발생했을 수익에 대한 피해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세계의 식민 열강은 아이티를 군대로 둘러싸고 국가를 파괴하겠다며 위협했다. 미주대륙에서 다른 아프리카인들이 자신의 자유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자 아이티라는 흑인의 승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이다. 아이티는 210억 달러 상당의 목재, 금 그리고 다른 자원들을 1947년까지 배상 목적으로 프랑스에 제공했다[7].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아이티는 주변 국가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었다. 아이티뿐만 아니라 이 최초의 흑인 국가와 관계를 맺는 위험을 감수하는 모든 세력이 [식민 열강의] 목표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1826년, 파나마 의회는 미국의 압박 때문에 새롭게 건국된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공화국을 한데 모으는 자리에 아이티를 초대하지 않았다[8]. 게다가, 미국은 1862년까지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아이티에 대한 전 세계적인 인종차별적 고립이 고착화되었다.

독재를 타도하다
“아이티 국민은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을 따르기를 거부합니다. 오늘날 아이티 국민들은 여러분의 연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마리세 나르시스, 2017년 4월 23일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아이티의 저항운동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만큼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티 대중에게는 현대 혁명 세력은 풀뿌리 운동과 정치 조직인 판미 라발라스에 담겨있다. 이 정당의 이름은 아이티 크레올어로 대홍수를 의미하며 판미 라발라스당은 아이티 국민의 한결같은 외침인 식민지 지배에 “굴복하지 말 것”을 대표한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아이티 혁명의 유산과 1957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의 지원으로 이어진 독재에 대항한 투쟁에서 탄생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공식적으로 아이티를 점령했으며 지속적으로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약탈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아이티국립은행(Haitian National Bank)의 금 보유고에서 당시 50만달러에 육박하는 금을 가로채갔으며 아이티에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웠다. 아이티 농민들은 농촌에서 투쟁을 조직했지만 잔인하게 탄압당했다. 공식적인 미국의 점령이 끝난 이후에도 1957년부터 1971년까지 집권한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Francois Duvalier) 정권하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파파독[9]이라고 알려진 뒤발리에는 국제적으로는 흑인 민족주의자이자 포퓰리스트로 잘못 알려졌다[10]. 뒤발리에 독재정권은 수십 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내 테러리즘을 대표한다. 이는 뒤발리에 정부가 자신의 암살단인 통통 마쿠트[11]를 통해 수천만 명의 가난한 아이티 국민들을 고문하고, 암살하고, 처형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결과, 많은 아이티 국민은 자국을 떠나 주로 미국과 캐나다로 갔다. 쉽게 나라를 떠날 수 없었던 빈곤한 다수 아이티 국민은 국가의 억압과 생필품 부족이라는 잔혹한 상황을 견뎌냈다. 뒤발리에 정부는 아이티의 인적 자원과 자연 자원을 착취하고 약탈하는 외국 기업 이익을 위해 강압적으로 개방했다.

1971년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사망하고 베이비 독으로 알려진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Jean Claude)가 정권을 이어받아 지역과 국가 경제를 황폐화시킨 초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한다. 그 결과 수천만 명이 아이티를 떠나 바다를 통해 이주하면서 목숨을 잃게 만드는 위기가 생겨났고 수천만명이 해외로 이주했다.

1986년 아이티 민중은 일련의 평화적인 민중 시위를 통해 베이비 독을 축출했다. 뒤발리에에 맞서 대항하고 아이티의 자주와 국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성장한 운동은 판미 라발라스(대홍수)로 나타났다. 판미 라발라스는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 과정을 이끈 민중 운동을 통해 생명의 존엄과 인간애를 지켰다.

대홍수가 일어나다
4월 24일 로스 엔젤레스에서 아이티의 풀뿌리 운동의 전망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르시스 박사는 감동적으로 대답했다. “아이티 민중은 일어날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이티 민중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아이티 민중은 민중권력을 다시 세우는 것으로 그들 혁명의 부활을 시작했다.

차베스 시대의 베네수엘라와 모랄레스의 볼리비아처럼 혁명적 좌파정권 집권 전에, 아이티는 1959년 쿠바 혁명에 이어 판미 라발라스 풀뿌리 운동으로 최근 몇 십 년의 미주 대륙의 변화를 향해 길을 닦았다.

아이티 풀뿌리 운동 지도자들은 운동 세력이 선거 과정에 참여했지만 판미 라발라스를 전통적 의미에서의 정당으로만 보지 않았고 정치조직이자 운동으로 간주했다. 아이티 민중은 판미 라발라스가 대중을 단결시키고 정치 권력을 세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1990년 카톨릭 성직자이자 지도자였던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국민의 의지를 보여주는 67% 지지를 받고 외국의 개입 없이 처음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판미 라발라스는 풀뿌리 운동이 이끌고 정부가 시행하는 아이티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책들을 도입했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여성부를 창설했고, 아이티 크레올어를 공식언어로 부두교[12]를 국교로 인정했고, 최저임금을 두배로 인상했고, 뒤발리에 정부 하에서 셀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아이티 군을 해산시켰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판미 라발라스의 풀뿌리 사업은 독립적인 지도자인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지원과 이어진 라발라스 정부의 지원으로 1804년부터 시작해 1994년 이전까지 지어진 학교 수보다 더 많은 학교를 지었다.

게다가 아리스티드는 대통령으로서 아이티 자원의 국가 소유와 아이티 국민에게 토지 재분배를 헌법적으로 보장했다. 라발라스의 비전은 여러 광물 중에서 금, 석유, 우라늄 추출에 관심을 가진 초국적 관광, 광산, 석유 대기업의 사업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것이었다. 초국적 기업의 사업은 창출된 부를 아이티 대중에게 재분배 하지 않고 아이티의 자원을 약탈하고자 했다.

아리스티드 대통령 집권 동안 판미 라발라스의 혁명적 움직임에 대응해 미국과 프랑스 정부는 아이티의 백인 엘리트와 손잡고 쿠데타를 조직해 아리스티드를 즉각 추방하고 라발라스 지도자들을 탄압, 투옥, 실종, 암살했다. 아리스티드는 수년간 망명생활을 한 후 1994년 아이티로 돌아왔다. 연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99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92% 지지율을 받아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04년 아이티 혁명 200주년을 맞이해 아리스티드는 독립 이후 약탈당한 210억달러 반환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런 요구로 미국, 캐나다, 프랑스는 또 다른 쿠데타를 공모했고, 아이티는 오늘 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소용돌이에 빠졌다. 유엔 점령하의 아이티, 외세 개입, 경제의 황폐화, 풀뿌리 운동진영에 가해지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상황 등이 그것이다.    

“굴복하지 않는다”
아이티 민중을 쓰러트리려 한 파괴 공작에도 아이티 국민들은 끈기 있게 견뎠다. 아이티 민중은 백인 우월주의에, 자본주의에, 유럽 식민지주의에, 미국 제국주의에 복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티 민중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중력이라는 운동 법칙에 맹렬하게 도전하며 신화 속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맞서 싸운다.

2010년 1월, 아이티는 정부 통계로 23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지진 후에 겨우 살아남았다. 지진의 여파를 겪는 동안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지진 발생 1년 후부터 재난 상황에서 아이티 민중의 저항과 복구의 이야기를 담은 “아이티-아이티: 정신적 탈식민지화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출간했다.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7년간 아프리카에서 망명생활 동안 스와힐리 말을 배웠고 역사적으로 제국주의 약탈에 대항해 아프리카 대륙의 투쟁과 서반구에서 아이티의 저항에는 분명한 연결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기간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깨달았던 것이 있다. “스와힐리어로 아이티(Haitii)는 굴복하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우리가 자유를 얻을 때까지 아이티(Haiti)는 굴복하지 않는다(Haitii). 굴복하지 않는다(Haitii)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이름은 아이티(HAITI)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국가, 아이티에 대해 언어적 추론과 역사적 확신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저항할 것이라는 풀뿌리 운동의 결단으로 모아진다. 세계의 많은 조직가들이 현존하는 패권은 종식되고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세계권력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현 정세에서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판미 라발라스의 만트라에는 “혼자라면 우리는 약하다. 뭉쳐야 강해진다. 우리 모두가 라발라스다”라는 신념이 있다. 아이티의 신념은 국경을 넘어 우리의 상황을 지배하는 체제에 집단적으로 복종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히려 아이티 민중은 그들의 대홍수 시기에 단결하고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것처럼 우리가 자주를 향해 우리의 길을 닦아나갈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1. Famni Lavalas, 아이티 좌파정당
  2. Dr. Maryse Narcisse. 나르시스 박사와 아이티의 풀뿌리 정치 플랫폼에 대해서는 아이티 행동 위원회(Haiti Action Committee)의 2016년 8월 뉴스레터 참조 (http://haitisolidarity.net/wp-content/uploads/2016/12/haiti-solidarity-august-2016.pdf)
  3. 국가로서의 아이티는 영어로 Haiti라고 표기한다. 동음이의어
  4. Haiti-Haitii: Philosophical Reflections for Mental Decolonization: 본 기사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는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의 글로, 아이티의 역사를 저항의 역사라는 시각에서 보고 있으며 아이티 국민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독자에게 아이티 민중의 투쟁에 연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5. Quisqueya. 아이티(Ayiti)는 타이노-아라왁(Taino-Arawak)에서 원주민 언어로 ‘집 또는 대지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폰(Fon)에서는 ‘신성한 대지 또는 고향’을 의미한다. 키스케야는 ‘모든 대지의 어머니’라는 의미이며,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해당하는 영토를 가리킨다.
  6. 마룬은 식민지 노예제도에서 스스로 해방된 아프리카인을 뜻한다. 이들은 자치적인 사회와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아프리카 전통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습을 만들어 나갔다. 마룬은 원주민과 공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룬은 또한 조직적인 영향력을 갖추고 다른 흑인 노예들을 해방하는 데 나서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여러 전략 중에서도 식민주의자와 플랜테이션을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아이티의 혁명적 저항의 역사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캐롤린 픽(Carolyn Fick)의 “아이티의 탄생(The Making of Haiti)”과 C.L.R. 제임스(C.L.R. James)의 “검은 자코뱅(The Black Jacobins)”을 참조
  7.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전 대통령은 프랑스에 위에서 언급한 기간 동안 프랑스가 강탈해 간 만큼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아이티 민중의 배상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에 이 수치를 대중에 공개했다.
  8. 시몬 볼리바르가 이 이니셔티브를 주도했고, 그 또한 아이티 혁명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다. http://newsjunkiepost.com/2014/10/18/et-tu-brute-haitis-betrayal-by-latin-america/
  9. Papa Doc, 전직 의사였던 프랑수아 뒤발리 대통령의 별명으로 사망후에는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가 대통령직을 세습해 15년간 독재정권을 이어받았다. 아들의 별명은 베이비독(Baby Doc)이다(역주)/li>
  10. 뒤발리에는 공식석상에서 아이티 크레올어를 사용했고 흑인권력으로 잘못 일컬어진다. 이러한 정치적 위장은 최근 미셀 마르텔리(Michel Martelly)대통령이 뒤발리에주의자의 경향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내용은 없는 좌파적 라틴아메리카 통합주의자의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1. ton ton macoutes  아이티 설화에서 통통 마쿠트는 어린이들을 자루에 담아 데리고 가서 아침으로 먹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아이티인은 이를 도깨비라고 부른다.
  12. 아이티의 부두교(vodoun)는 아프리카의 요루바와 반투의 신념 체계에 기반한 종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