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예멘 난민: 예멘의 역사, 한국 대중의 정서, 인권법을 살펴보다
글: 안드레아 슈니처 (교열팀, ISC)
번역: 예선희 (번역팀, ISC)/안소연
2018년 1월부터 5월까지, 대부분이 미혼 남성인 550여명의 예멘 난민이 관광 목적일 경우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한국의 가장 큰 섬인 제주도에 도착했다. 예멘 난민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일부 한국인은 일종의 “침략당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는 난민 지위 신청자를 반대 시위와 대규모의 청와대 홈페이지 청원운동을 촉발했다.
이 글은 외국인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한 역사적 지식 부족을 간략하게나마 해소하고, 왜 한국인의 대부분이 제주도의 난민 지위 신청자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모든 한국인을 외국인 혐오자로 일반화하기 보다는 한국의 인권을 수호할 의무와 함께 난민 지위 신청자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했다. 그리고 현재 한국에서 지난 2년간 거주하고 있는 이집트 출신 망명자 압델라흐만 자이드(Abdelrahman Zaid) 씨의 시각도 다루었다.
예멘 내전
예맨 내전은 최근에 일어난 일이고, 국민의 다수가 연관된 시민 전쟁과는 달리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인다. 예멘 인구는 2천 9백만 명에 달하지만, 정작 내전에 불을 지핀 후티(예멘의 이슬람 자이디야 시아파 무장 단체)와 극단주의 시아파 무장반군의 수는 인구의 0.4%도 되지 않는, 약 10만 명에 불과하다.
예맨의 중동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이고 그러한 빈곤은 사회적 불안을 조성했다. 예멘 경제문제의 원인을 꼽자면 부정부패, 석유자원의 감소와 카트(Qat)라는 마약성 식물이 다른 식량 작물을 대체하게 되어버린 것 등이 있다. 경제적 요구에 대한 정부의 무대응은 2004년 후티가 쿠데타를 시도하기에 충분한 수의 지지자를 확보하는 데 일조했다. 후티의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2011년에 일어난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은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막았다. 처음에는 북 예멘 대통령으로 시작해 남 예멘과 통일하여 통일 예멘의 대통령을 지내고 30년 동안 권좌에 있었던 살레 대통령의 자리를 조기선거를 요구한 좀 더 중도성향의 부대통령 압두 라부 만수르 하디(Abdu Rabbu Mansour)가 대신했다. 3년 후, 공약 미이행과 정부에 대한 불만족으로 인해 후티 반군은 2014년 수도인 사나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가 2015년 사나 공습에 나서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가 개입에 나선 것은 이란(역내 라이벌)이 후티 반군에 행사하는 영향력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후티는 사나 점령에 대해 순수하게 국내의 일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반군이 사용하는 무기가 이란에서 왔다는 주장이 있었다. 지난 3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레이트, 그 외 7개국[1]은 예멘에 침입하고 폭격을 가해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내전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 중 75%는 미국과 영국을 등에 업은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것이었다.
이 싸움의 중간에 갇혀있는 대부분의 예멘인들은 살아 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전체 인구 2천 9백만 명 중 2천 2백만 명이 인도적인 지원이 필요한 상태이고, 이는 현재 세계에서도 단일 그룹으로는 가장 큰 규모로 도움이 가장 절실한 상황이다. 불행하게도 미국과 유럽의 지원을 받는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이 “친 이란 반군,” 즉 후티 반군을 뿌리 뽑는데 주력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루어졌고, 수천 명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고,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현재의 인도주의적 위기
정확한 수치를 계산하기 어렵지만 약 5만명이 이 무력충돌로 인해 사망했다. 숫자만으로 그 참상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근에 버스 폭격으로 탑승자 51명이 사망했는데, 그 중 40명이 아이들이었다. 버스 잔해 속과 병원을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으려던 압델하킴 아미르(Abdelhakim Amir) 씨는 “손가락이나 뼈, 두개골이 아니라 아이가 입었던 옷 조각밖에 찾지 못했다. 병원에 있는 모든 유해를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폭격으로 사라졌고, 유족들은 땅에 묻어주기 위한 그 어떤 것이라도 손에 쥐고자 했다. 나중에 미국이 이 폭탄을 만들어 사우디아라비아에 팔았다는 것이 폭탄 파편의 사진을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폭력에 더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구호물품 지급을 막아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후티 반군을 약화시키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연합군은 주요 항구에 식량과 연료를 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그나마 운영되던 병원(50%이상은 이미 파괴되었음)이 문을 닫았고, 예멘 국민들은 의료품과 식량을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내전은 병원뿐만 아니라 물과 위생시스템도 완전히 파괴했고, 그 결과 사상 최악의 콜레라가 창궐했다. 2018년 4월 현재, 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2천 2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폭격으로 인해 식량과 물, 연료와 의료 물품의 수송로가 파괴되면서 기근과 질병을 야기했다. 지난 해에 5만 명의 어린이가 사망했고, 40만 명의 어린이가 가까운 미래에 기아로 사망할 위기에 처해있다. 경제가 무너지고 일자리가 부족하다는 것은 부모들이 그나마 있던 최소한의 식량도 이제는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나라를 떠나는 것은 그것이 가능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임이 확실해 보인다.
난민 수용에 대한 한국 내 논쟁
알자지라에서 제주 도민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도민들은 몇 번씩이나 한국 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주민과 소통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한국 국민들은 정부가 여론의 우려에 귀를 기울이고, 난민에게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것으로 그러한 우려를 해소하기를 기대한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50%의 한국인이 한국 사회에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하는 반면, 40%는 난민 수용을 지지한다. 이 정도의 격차는 난민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난관으로 보이진 않는다.
한국은 2012년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난민법을 도입했다. 난민법은 난민의 지위에 관한 UN 협약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국제적 조약으로서의 구속력을 가지게 되었다. 법은 난민 지위를 신청할 권리는 보장하지만, 그렇다고 망명 허가를 받는 것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난민법은 농르풀망원칙을 포함하고 있어서 비록 정부가 난민 지위 신청을 거절할 수 있지만 신청자가 송환되었을 때 실질적인 신변의 위험이 따를 경우에는 송환 조치를 할 수 없다. 예멘 난민들이 한국에서 지낼 곳을 찾지 못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예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을 강제 송환 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당면한 과제는 난민 신청자들을 심사할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난민 신청자들의 모국어로 소통할 인력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무자격 아랍어 통역사가 난민들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식으로 조서를 조작한 것이 드러나자, 한 판사는 오역된 번역 조서들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제주도에는 검증된 아랍어 통역사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무능력에 대한 단상인지 아니면 한국 정부가 난민들에 대한 의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법무부가 영구 난민 허가를 내 준 사람은 전체 지원자 중에 4%에 불과하다.
근거가 있든 없든, 한국 정부와 시민 사회는 난민들이 범죄자가 될 것이라는 대중적 두려움에 맞서 이를 물리쳐야 한다. 이는 편견과 이슬람 혐오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난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한국이 난민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에는 공권력을 더욱 공정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강화해 내국인을 안심시키고,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범죄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것을 포함한다. 더 나아가 시민 단체도 지속적으로 외국인 공동체와 한국인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진보진영의 시각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의 삶은 아직도 어렵다. 한국계 미국인 송대한 씨는 “한국에서 살기란 힘들다. 그래서 한국인들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고,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경제가 썩 좋지 않으며, ‘미투’ 운동에서 나타난 것처럼 여성들이 안전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보수적 반동 모드로 전환되기 쉽다”고 말했다. 다른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보수적 반동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불평등의 심화는 경색된 고용시장 내의 경쟁자로 보이는 “아웃사이더”에 대한 반발을 낳았다. 또한 중동 남성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편견이 국내 여성들의 성폭력으로부터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황정은 씨는 “난민 문제는 많은 한국사람들에게 생소한 이슈이고,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생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다. 또한 한국은 일반적으로 인권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언론 보도가 난민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는 점이다[2]. 황 씨는 “시스템에 대한 팩트 체크나 비판, 또는 예맨 난민의 발생 원인에 대한 설명 보도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하며 “정부는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제공하여 가짜 뉴스나 잘못된 정보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시민 단체들 또한 정확한 정보 출처가 될 수 있고 대중을 상대로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한 캠페인을 실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사회 운동에도 보수주의적 요소들은 잔존한다. 심태은 씨는 대학교 재학 시절 한 농민운동의 지도자가 농촌을 퇴색시킨다(또는 망가뜨린다)며 동남아 여성들을 비난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심 씨는 “결혼을 하고 노동력을 얻기 위해 동남아 여성들을 “돈으로 산” 것은 바로 한국인 남성들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당신들도 “혈통주의”에 집착하는 또 한 종류의 보수주의자일 뿐이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국수주의적 자부심과 세계화된 현 시대에 “한국인”의 이미지를 재정립하려는 노력 간의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난민 지위 신청
이집트인 난민 신청자 압델라흐만 자이드 씨는 “그 어느 국가도 열린 사고 방식을 갖지 않거나, 국경을 개방하지 않고는 자유로운 세계의 일환의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이드 씨의 문제는 한국인들이 외국인에게 마음을 열 때까지 “5년, 10년, 또는 20년”을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정부 시위를 이유로 선고된 5년의 징역형을 피해 이집트를 떠난 후 자이드 씨는 지난 2년 6개월간 한국에서 살고 있다. 한국은 입국 비자 요건이 없었던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나 입국의 허용이 인간다운 환경의 허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국내 난민 신청자들은 입국 후 6개월간 근로가 금지되고, 난민 신청자중 95퍼센트는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못한다. 자이드 씨는 난민 신청 절차가 난민 신청자들의 의지를 꺾고 불법 근로의 덫으로 몰아넣어 난민으로 수용될 기회를 없애기 위해 고의적으로 까다롭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자의적인 난민 신청 거부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자이드 씨와 다른 이집트 난민 신청자들은 약 한달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다[3]. 자이드 씨는 자신과 함께 목소리를 내고 거리 행진에 참여한 한국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로부터 희망과 기운을 얻었다. 외국인과 한국인들 간에 사회를 개선하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이드 씨의 궁극적인 바람은 “새 삶을 시작하고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환경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이드 씨가 한국에서 겪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 발전을 이룩하고, 독재정권, 한국 전쟁과 일본의 침략을 이겨낸” 한국의 역량을 높이 샀다. 지금 그는 한국을 좀 더 평등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다.
결론
반발에 대한 이해와 대응이 논의를 진전시키는 열쇠이다. 그러나 가짜 뉴스와 편향된 보도는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정부는 편향되고 거짓된 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시민 사회는 시민인권교육을 늘리고 난민과 취약 계층과의 연대를 보여주는 동시에 현 시대의 ‘한국인’에 대한 정의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난민 신청 시스템도 국내외적으로 점검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국가가 난민 신청자들의 입국을 애초에 차단함으로써 난민 문제와 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난민 신청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진보 단체들이 국내 난민 및 취약 계층을 위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내고 있어 전체적으로 보면 희망적이다. 현대 세계에서의 한국의 현주소와 정체성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업데이트: 난민 신청자들의 단식 투쟁은 9월 13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위원장으로부터 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약속을 받은 후 종결되었다.
더 자세히 알고 싶거나 참여하고 싶다면
제주도의 난민을 돕기 위해 여러 단체가 활동 중이며, 종교 단체도 1980년대 이래로 이주민 권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해 왔다. 불교 승려와 가톨릭 수녀들도 다른 구호 단체와 협력해 예멘 난민을 지원하고 있다. 참여를 원할 시에는 난민인권센터(http://nancen.org/)를 통해 제주와 한국 내 단체에 기부하거나, 난민들과 직접 협력하는 가톨릭 단체인 나오미센터에 기부할 수 있다(기부 계좌는 국제전략센터로 문의바람).
- 연합군은 이집트, 모로코, 요르단, 수단, 아랍에미레이트, 쿠웨이트, 바레인, 미국 민간 용병 (올해 초에 카타르가 연합군에서 탈퇴) 등으로 구성되었다. (OHCHR과 HRW에 따르면) 미국, 영국, 프랑스는 수송과 첩보 지원을, 브라질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를 판매했다 https://www.ohchr.org/Documents/Issues/Terrorism/SR/A.HRC.40.%20XX.Add.2SaudiArabiaMission.pdf https://www.hrw.org/world-report/2018/country-chapters/yemen
- 6월 1일부터 7월 20일 사이 7개 방송국에서 난민 이슈를 44번 보도했다. 전체 보도 중 33퍼센트는 단순한 찬성과 반대를 다룬 보도였고, 20퍼센트는 정부의 대응에 관한 보도였던 반면, 13.6퍼센트는 타 국가들의 난민 이슈 대응 방식을 다루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9653
- 난민 신청자들의 단식 투쟁은 국가인권위원회 최영애 의장이 이들을 방문하여 단식 투쟁을 종결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내 난민들의 고통을 종식시킬 것을 믿어줄 것을 논의한 후에야 끝이 났다. https://mnews.joins.com/article/22968740#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