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어두운 시대라도 책과 노래와 춤이 있다 (2024년 10호 뉴스레터)
* 본 기사는 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의 “There Will Be Reading and Singing and Dancing Even in the Darkest Times: The Tenth Newsletter (2024)”를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 이재오(번역팀, ISC)
감수: 심태은(번역팀, ISC)
안녕하세요
트라이컨티넨탈: 사회연구소에서 인사드립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계속하고 콩고민주공화국 동부에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즐거움을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가자지구와 콩고민주공화국 고마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두 지역의 가장 시급한 요구는 폭력을 종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팔레스타인의 군사 점령을 끝내는 것처럼, 폭력의 뿌리 또한 뽑아야 합니다. 이런 분쟁과 마주하면 현재에 사로잡혀 미래를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세계 상당수 지역이 기아로 신음하는 것과 함께, 일상이 계속해서 붕괴하는 상황에서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란 불가능해졌습니다. 가자와 고마,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곳의 요구는 똑같습니다. 폭탄을 하나 덜 하고 빵 한 조각을 더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즐거움과 희망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당면한 수모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지평선을 찾아 나섭니다. 거의 10년 전, 저는 팔레스타인 라말라 북부 잘라존 난민촌에서 유엔 난민구호기구(UNRWA) 학교에서 오후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학교가 위치한 서안지구에서는 이스라엘 군인이 팔레스타인인을 여러 차례 살해한 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UNRWA 학교의 미술 학습 시간에서 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최근에 꾼 꿈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제가 교실에서 아이들과 이야기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많은 아이가 보통 아이들이 그릴 만한 것들을 그렸습니다. 집, 햇살, 집 옆에 흐르는 강, 그네나 미끄럼틀에서 노는 아이들 같은 것들이었죠. 그림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이나 검문소, 이스라엘 군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단순히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그렸을 뿐입니다. 바로 행복을 상상한 것입니다.
이제 가자지구의 친구들에게 아이들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제 친구들은 아이들이 전쟁의 소리, 폭격의 흙먼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라파에 사는 살림은 두 딸이 자기 삼촌 집 바닥에 앉아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종이 조각에 그림을 그린다고 말합니다. 살림은 “내년에는 가자시에서 ‘빨간 책의 날’ 행사를 하겠습니다. 인샬라.”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무슨 책을 읽을 거죠?”라고 물었습니다. 살림은 “당신을 생각하며 위대한 팔레스타인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읽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기억을 위한 망각”이라는 시를 낭송했습니다.
시인이여, 이 전쟁에서 무엇을 쓰고 있는가?
나는 나의 침묵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총이 말할 차례가 되었단 말인가?
그렇다. 그 총성은 내 목소리보다 크다.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인내를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이기겠는가?
아니. 중요한 것은 견디는 것이다. 견디는 것 그 자체로 승리다.
그럼 그 후에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겠지.
그럼 다시 시를 쓰겠는가?
총이 조용해지면. 내가 목소리로 가득 찬 내 침묵을 폭발시키면. 내가 할 말을 찾으면.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라파를 폭격하기 시작했지만 살림은 시간을 내서 ‘빨간 책의 날’ 행사에 대해 말합니다. 살림과 아이들에게 현재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평선 너머, 집단 학살의 현재, 그 너머를 상상합니다.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칠레까지 150만 명이 ‘빨간 책의 날’ 행사에 참여했고, 이는 이제 국제 진보 진영의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2019년부터 인도 좌파 출판사 연합은 1848년에 공산당 선언이 처음 출판된 날인 2월 21일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세계에서 많이 읽힌 책 중 하나인 공산당 선언은 지난 150여 년간 이어져 온 사회주의의 역사에 걸쳐 세계의 수십억 명에게 기아, 문맹, 빈곤, 집단 학살, 전쟁 등 자본주의로 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지금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2월 21일은 국제 모국어의 날과 겹치기 때문에 ‘빨간 책의 날’ 행사에서는 작가, 출판사, 서점, 독자들이 공공장소에서 공산당 선언을 모국어로 낭독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팬데믹 기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020년 처음 열린 ‘빨간 책의 날’ 행사에는 인도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대한민국까지 전 세계에서 총 30,000명이 참여했습니다. 이후 행사의 취지는 공산당 선언뿐만 아니라 어떤 “붉은 책”이든 읽는 날이 되었습니다. 많은 곳에서는 좌파적인 이상을 더 깊게 수용하여 공동체적인 삶을 다시 회복하고 좌파적 문화를 홍보하는 다양한 페스티벌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올해 국제좌파출판사연합(IULP)은 2월 초 ‘빨간 책의 날’ 행사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청년 예술가이자 공산당 간부인 쳄 파르바티의 강렬한 춤을 담은 영상을 발표했습니다. 파르바티는 티루바난타푸람의 시장과 공장을 걸으며 프랑스어 버전의 인터내셔널가에 맞춰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가 끝날 때 파르바티는 해변에서 휘날리는 공산당 깃발을 들고 있으며, 수평선 너머로 붉은 해가 집니다. 영상은 널리 퍼져 ‘빨간 책의 날’의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올해 행사에는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이 독서와 공연 조직을 독려하기 위해 그린 독창적인 기념 포스터들도 있었습니다.
참여의 폭과 깊이로만 봐도 2024년 행사는 저희가 조직한 이전 행사를 모두 뛰어넘는 규모로 보입니다.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대중 행사를 조직하였고, 아바나 도서전에서는 2월 21을 특별 행사 일정으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가나 사회주의 운동과 브라질 무토지노동자운동(MST), 호주의 레드 앤트와 방글라데시 노동당은 사회주의 서적 낭독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네팔 고산지대 작은 마을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학습과 투쟁의 중요성을 논하는 회의를 했습니다. 뉴욕시 피플스 포럼에서는 공산주의 운동가 클라우디아 존스의 삶과 저서를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고, 칠레에서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연설문을 낭독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코뮨 서점에서는 제국주의 세력이 어떻게 인권이라는 개념을 악용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공산당은 에오나흐 마카 문화센터에서 낭독회와 워크숍을 조직하였고, 영국 공산주의 청년단과 인도학생연합 대표단은 사우스햄튼 대학교에서 청년 카를 마르크스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빨간 책의 날’은 이제 인도 좌파의 문화적 지형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올해 ‘빨간 책의 날’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케랄라에서는 EMS 남부디리파드의 책 레닌주의와 인도 혁명의 방법론을 읽고 토론하는데 50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중 가장 큰 행사는 티루바난타푸람에서 열렸으며, MV 고빈단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 케랄라 지역 위원장이 주최했습니다. 이에 더해 진보예술문학조직(PuKaSa)이 공산당 선언이 현재에 주는 교훈에 대한 세미나를 열었고, PuKaSa의 나티카메칼라 지역위원회 소속 VKS 노래패는 공산당 선언을 뮤직비디오로 표현하였습니다. 카르나타카에서는 MA 베이비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 정치국 위원이 “레닌과 문화”를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안드라 프라데시와 텔랑가나 지역에서는 노동자, 농민, 청년이 모여 레닌의 삶과 저서에 대해 논의했고, 이를 위해 마나 만치 푸스타캄 서점에서는 웨비나를 조직했습니다.
마하라슈트라에서는 고다바리 파룰레카르의 인간의 각성에 대한 웨비나가 열렸습니다. 인도학생연합은 아삼을 비롯하여 인도의 많은 곳에서 공산당 선언 독서 모임을 조직하였습니다. 웨스트벵골과 타밀나두에서는 아이자즈 아흐마드와 제가 함께 쓴 정치적 마르크스를 방글라어와 타밀어로 읽었습니다. 같은 지역에 있는 첸나이시 중심부에서는 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의 G. 라마크리슈난이 독서 행사를 개최하여 수많은 사람이 레닌: 혁명의 북극성이라는 책자를 읽고 토론을 나눴습니다.
하이데라바드 중앙대학교와 영어외국어대학교의 학생들은 ‘빨간 책의 날’을 더 광범위한 문화 공연으로 만들기로 하고 포스터 전시회와 도서전을 기획했습니다. 뉴델리에 있는 메이데이 서점에서는 노래와 춤, 그리고 자나 나티아 만치의 거리극 공연이 있었고, 인도의 여러 언어로 공산당 선언을 낭독하고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시 낭송이 있었습니다.
2025년 ‘빨간 책의 날’을 준비하며 IULP는 매달 SNS에 포스터를 공개할 것이며, 이를 연말 ‘빨간 책의 날’ 캘린더에 취합할 것입니다. ‘빨간 책의 날’이 2월 21일 하루만의 행사가 아니라, 이를 위해 일 년 동안 준비하는 활동을 모두 포함한다는 의미입니다.
‘빨간 책의 날’은 이성적 사고를 몰아내려 하는 반계몽주의 사상에 맞서 사회주의 서적을 쓰고, 출판하고 읽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투쟁의 일부입니다. 저희 최근 도시에에서 볼 수 있듯이 반계몽주의 사상의 한 예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고대 인도가 성형외과 기술이 뛰어났다고 주장하며, 힌두교의 신 시바가 그의 아들 가네시 신의 머리를 코끼리 머리로 바꾼 것을 증거로 꼽았습니다. ‘빨간 책의 날’은 전 세계 40여 개 출판사가 모인 IULP가 주도하기는 하지만, IULP가 모든 행사를 조직하는 것은 아닙니다. ‘빨간 책의 날’ 행사가 IULP를 넘어서 좌파 전체의 중요한 기념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빨간 책의 날’이 저희 네트워크를 넘어 멀리 퍼지는 것을 보고 매우 고무적이라고 느꼈습니다. 대중 문화의 일부가 되어 이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사회의 근간으로 세우는 것이 바로 ‘빨간 책의 날’의 취지이기 때문입니다. 2030년에는 천만 명이 ‘빨간 책의 날’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꼭 가자지구에서 ‘빨간 책의 날’ 행사를 가지고자 합니다.
따뜻한 연대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비자이 프라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