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글: 송대한(콘텐츠팀)

번역: 심태은(번역팀)

1945년 9월 9일, 미군이 서울 일본 총독부 건물 앞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대신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한반도는 휴전 상태이지만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오석민, “미군, 1945년 일본 항복식 사진 공개”, 연합뉴스, 2020년 9월 9일.

2024년 1월 15일,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에서 남한과 북한을 동포로 보는 개념과 평화통일 추구를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게다가 교육에서 남한이 북한의 제1 적대국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 총비서는 이것이 선제공격을 통한 통일을 천명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북한은 남한을 점령하고 평정하며 북한으로 편입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연설로 북한은 지난 30년 넘게 북한의 이전 두 지도자가 추구했던 평화통일 원칙과 단절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은 미국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고 남한과 평화통일을 이룩하고자 했다. 그 시기에 남북 관계는 부침이 있기는 해도 평화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이번에 바뀐 북한의 남북 정책은 평화통일에서 더 멀어지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전쟁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시 평화를 추구하는 길로 들어서려면 이런 변화를 유발한 요인과 현 상황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지정학적 맥락을 살펴봐야 한다. 여기에는 미국과의 평화 협상 실패, 남한 정치의 역사적, 사회적 한계, 미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로 인한 동북아 지역 내 양극화 심화 등이 있다.

미국의 노예제 반대론자 프레더릭 더글라스는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평화운동은 전쟁 반대라는 공동의 요구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이 지역을 두 진영으로 갈라치는 미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에 반대하고, 미국에 계속 의존하게 만드는 남한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해야 하며, 남한과 역내에서 벌어지는 최전선의 투쟁을 결합하여 미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에 맞서는 공동의 투쟁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정은 총비서의 시정연설

2024년 김정은의 시정연설은 오랜 기간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김정은은 전쟁을 준비하는가?”라는 글을 쓴 로버트 칼린과 지그프리드 헤커 등 많은 사람에게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김정은은 연설에서 남북한을 “8,000만 동포”로 표현한 것이나 “자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이라는 문구를 북한 사회주의 헌법에서 삭제할 것을 제안하며 남한을 적대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또한 “대한민국이 [북한의] 제1 적대국이며 불변의 주적”이라고도 주장했다.

이러한 어조는 지난 30년간 이어졌던 접근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통일과 관련하여 김정은은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평정하며 수복하고 우리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할 것”을 제시했다. 동포 관계를 단절하면서 김정은은 “일방적인 ‘무력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선제공격”이 목표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실제로 전쟁을 통한 통일이라는 가능성을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지만, 이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관계는 끊지만 전쟁은 선포하지 않는 기조는 “최우선 과업은… 최대한 빠르게 인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개선하는 것”이라고 하는 등 연설의 3분의 2 이상이 북한 경제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이는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도되지 않는다). 이는 다가오는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의 언사로 보기 힘들다.

그러나 북한 정책의 변화는 현 상황을 단순히 성문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임박하지는 않았지만, 전쟁의 위협이 다가오고는 있다. 이정철 서울대 교수가 지적하듯이 현재의 세계 및 역내 정세, 윤석열 정부의 강경한 기조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선언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미국, 대만 간의 갈등이 한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미국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등 역내 전쟁과 갈등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윤 대통령과 김 총비서의 계산 착오 또는 대응 수위 상승 등은 이 지역에서 전쟁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이 시정연설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2023년 12월 27일 제9기 제8차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이해에 도움이 되는 맥락을 엿볼 수 있다. 김 총비서는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 꼭두각시”로, “통일”을 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대”라고 말했다. 또한 어느 당이 집권하든 간에 남한 통일 정책은 언제나 북한의 붕괴와 흡수 통일을 상정한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북한의 정책이 바뀐 것이라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봐야 한다. 그러려면 현재 상황이 벌어진 원인과 역학을 되짚어야 한다.


또 한 번 실패한 북미 협상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실패가 북한의 전략이 변화한 주요 기점이다. 이 회담은 1980년대 냉전 체제가 해소되고 북한의 대미 정책이 대결에서 유화로 변하면서 시작된 북미 협상의 실패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협상 과정에서의 부침을 돌아보면 북한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미국을 상대로 열심히 평화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지정학적 전략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미국은 협상 과정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핵 과학자이자 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소장이자 오랜 기간 북한 핵무기 전문가로 활동한 헤커는 저서 핵의 변곡점에서 이 협상 과정의 역사적 맥락과 동인에 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협상 과정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북한이 핵폭탄을 통해 미국과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냉전이 해소되고 중국이 미국, 나중에는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남한과 수교를 맺으면서 북한이 고립될 위기에 처함에 따라 촉발되었다. 1988년에 북한 지도부는 미군의 단계적 철수, 비무장, 남북 간 평화 등을 포함한 평화통일 계획을 제시했다. 북한의 자주권을 존중하는 대신, 북한은 “과거 일은 과거 일로” 덮고 미국과 “관계 개선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대미 정책이 대결에서 유화로 바뀐 것은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과 북한을 융단폭격한 것으로 인한 적대감을 감안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게다가 1992년에 북한은 비밀리에 “적대적일 수 있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 위험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는 것”을 용인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한 것처럼, 냉전 이후 시기에 이념적 유대가 약해지자, 북한은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력 균형추를 마련하고자 했다.

북한은 약자가 아닌 강자의 입장에서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한쪽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외교와 핵무기라는 투트랙 전략을 추구했다. 외교 전략이 실패하거나 지지부진하면 핵무기 개발로 돌아섰다. 평화든 핵 억지력이든,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핵 노선은 미국이 외교 노선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오랜 북한 전문가인 로버트 칼린과 존 루이스는 미국이 북한을 비핵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동북아시아 미래에 관한 미국의 비전에서 북한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으리라고 말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1994년 북미 합의에 기반하여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한 2000년 10월 공동성명은 이것이 현실로 될 뻔한 순간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

1994년에 한반도는 재앙과도 같은 전쟁의 화마로 빠져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북한이 사용 후 핵연료봉에서 핵분열 물질을 추출하여 플루토늄 폭탄을 만들 가능성에 직면한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의 영변 원자로 선제타격 가능성을 고민했다. 공격을 개시하면 북한이 남한에 공격을 가할 것이고, 그에 따른 충돌로 100만 명이 넘게 사망하게 될지도 몰랐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일성 수령을 만나 전쟁의 위기를 넘겼고, 1994년 북미 합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랜드 바겐”은 영변 핵시설의 단계적 해체와 이를 대체할 2개의 경수로 건설을 통해 북미 간의 외교 및 경제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다. 그리고 전환 과정에서 중유를 제공하기로 했다.

북한은 흑연 감속 원자로의 가동을 중단했고, 유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니터링을 수용했으며, 사용 후 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데 협조했다. 1998년에 미국 관료들은 의회에서 북한이 합의를 잘 이행하고 있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한편, 미국은 “핵무기 위협이나 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을뿐더러 경수로 건설 약속을 이행하지도 않았다. 1996년 12월, 공화당이 우세한 미국 의회는 클린턴 행정부가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미 의회는 북한이 붕괴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에 미국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자, 바로 이 시기에 북한은 우라늄 농축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는 두 번째 시도로, 기술적으로 더 정교한 (그러나 은폐와 확대가 더 쉬운) 핵폭탄을 향한 길이었다. 1998년에 북미 합의가 “빈사 상태”라고 하면서 북한은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런 도발에도 (또는 이 도발 때문에) 미국과 북한은 북미 합의를 다시 회복하고 “과거의 적대에서 벗어나 새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공동 성명을 2000년 10월 발표했다.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말, 북한은 미국의 향후 안보 목록에서 맨 아래에 위치”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네오콘의 정권 교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미국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참가했던 보수 네오콘 인사들은 북한의 외교 제안을 단순히 “북핵 프로그램을 위한 시간 끌기용”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따른 평가는 비논리적이다. 북한의 목표가 핵폭탄 개발이었다면,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가동을 중지하거나 그보다 더 많이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도 있는 대형 원자로의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냉전 이후 보수 네오콘의 이데올로기, 즉 주로 미국이 전 세계에서 (필요시 일방적인 군사 행동을 통해) 전략적으로 미국식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는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감대 형성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미국의 강경한 태도는 세계무역센터에 9.11 공격이 가해지고서 더욱 대담해졌다. 그리고 북한은 “악의 축”이 되었다. 게다가 나중에 유출된 부시의 핵 태세 검토 보고서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대상으로 한 핵 공격을 배제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협상은 부시 정부가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한다고 주장하면서 2002년 10월에 무위로 돌아갔다. 존 볼턴 같은 강경파가 행정부에서 북한의 “사기”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부시 대통령은 중유 수송을 중단했다. 영변 원자로 가동 중단은 미국의 중유 제공을 전제로 했으므로, 북한은 원자로 재가동을 선언하고 IAEA 사찰단을 추방했다. 헤커가 지적하듯이 북한이 1~2기의 핵폭탄을 만들 정도의 플루토늄 재고를 핵폭탄 5~6기 분량으로 늘리게 된 것은 부시 정권의 압박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중에 북미 회담에 중국, 러시아, 일본, 남한을 끌어들여 다자 외교를 시도했고, 여기서 중국이 북미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6자회담의 네 번째 회의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면 평화로운 원자력 이용을 보장하고, 가장 핵심적으로는 북미 관계 정상화를 골자로 한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경수로 건설도 “적절한 시기”에 논의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이 도출되고 나서 크리스토퍼 힐 미국 대사는 경수로 건설 중단, (북한에서 그동안 반대했던) 내부 사찰 요구, 논의 안건으로 인권 문제 및 기타 무기 개발 프로그램 추가 등 정권 강경파가 작성한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은 결승선을 끊었지만, 결승점 자체가 더 멀리 이동해 버린 셈이었다.

이후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에 있는 북한 자금을 동결했다. 전 세계의 은행에서 북한과 관계를 끊기 시작했고, 북한의 통화 가치는 급속하게 곤두박질쳤다. 중국 대표단이 지적했듯이, 미국은 협상 과정에 렌치를 냅다 집어 던졌다. 협상이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방코델타아시아 제재가 가해지자, 북한은 다시 핵무기 카드를 꺼내어 2006년 10월 9일 최초의 핵실험을 시행했다.

핵 역량을 과시한 북한은 다시 외교 무대로 복귀했다. 협상을 통해 2007년 9월에 부시 대통령은 5년 이내에 첫 번째 중유를 수송하기로 했다. 이듬해 6월 27일, 북한은 영변 원자로의 냉각 타워 중 하나를 폭파했으며, 이는 “[핵무기] 프로그램을 심각하게 제한”한 조치였다. 미국이 플루토늄 프로그램 폐기(2006년에 검증 완료)에서 우라늄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의심 가는 모든 장소를 사찰할 권리를 미국에 부여할 것과 핵물질 및 장비의 수출입 내역을 모두 제공하라며 또다시 결승점을 옮기자, 6자회담은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에 부시 대통령은 한 연설에서 북한이 “가혹한 통치를 끝내고 북한 인민의 존엄과 인권을 존중”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을 테러리즘 목록에서 지우지 못했으며,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복구를 선언했다.

김정일이 병에 걸리자, 북한에서는 협상에 영향을 줄 국내 역학의 변화가 급박하게 일어났다. 바로 “대외에 강건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김정일의 아들인 김정은에게 권력을 원활하게 이양하고 이를 공고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두 번째 핵실험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무시
신생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항의에도 북한은 위성을 발사하며 우주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켓 발사는 실패했고, 오바마 정부는 이를 도발 행위라고 규탄했다. 이에 북한은 6자회담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대응했으며, 6주 뒤인 2009년 5월 25일에 두 번째 핵실험을 전개했다. 부시 정권 강경파의 공격에 오바마 정부는 유화 정책에서 북한의 도발 행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이는 동시에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전까지는 그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 나서지 않겠다는 “전략적 인내”로 접근 방향을 틀었다.

헤커를 포함한 대표단에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공개한 이후인 2010년 11월, 북한은 미국이 2007년 10월 6자회담 합의안을 지킬 의향이 있다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2012년 2월 29일에 2.29 합의가 타결되었다. 처음부터 양국은 이 합의를 다르게 해석했다. 북한은 이 합의로 “자주와 평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양국 관계가 개선되리라고 보았고,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북한은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영변에서의 우라늄 농축 활동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이를 모니터링할 IAEA 사찰단”을 수용해야 했다. 미국은 북한에 식량 원조를 제공하고 북한의 안보 우려를 인정하며, 제재를 철회하고 경수로를 제공해야 했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과 함께 북한이 또 한 번의 위성 발사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는 김정일 사망 이전에 이미 정해졌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당사국이 발사를 막으려 했지만, 북한은 평화로운 위성의 발사가 2.29 합의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대로 진행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합의를 철회했고, 북한도 합의 철회와 핵 프로그램 개발로 응수했다. 헤커가 지적했듯, 미국이 조금의 관용을 보였다면 영변에 방문하여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개발을 막고, 북한이 핵 및 장거리 미사일 실험을 동결하는 합의를 이끌어냈을 수도 있다. 2013년에 북한은 또 한 번의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번에는 우라늄 폭탄을 사용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나머지 임기 동안 대화 거부와 제재를 결합한 “전략적 인내”를 유지했다. 그 결과 북한은 핵 노선을 고수하게 되었고, 소량의 “원시적인 핵무기”를 생산할 정도의 플루토늄, 한 번의 핵실험과 이 핵무기를 실을 미사일은 없는 상황이었을 것에서 25기의 플루토늄 및 우라늄 폭탄, “수십 번의 성공적인 미사일 실험”으로 상황이 악화했다.

네오콘이 탈선시킨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 회복 정책

미국발 제재의 강화와 수소 폭탄을 활용한 북한의 여섯 번째 핵실험과 미국 본토에 닿을 수 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실험 외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 간의 비방과 위협으로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북미 양국은 다시금 대화의 여정에 올랐다. 이는 북한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여 남북 대표팀이 단일기를 들고 입장하면서 기회가 열렸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트럼프 대통령과 김 총비서가 나중에 싱가포르에서 만나게 될 여건을 만든 남북 성명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욱 강화되었다. 대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북한은 핵실험 장소를 파괴(핵실험 가능성 감소)했고, 핵폭탄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성명에서는 북한이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은 볼턴이 개입하여 “북한의 핵, 화학, 생물학,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히 공개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궤도를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볼턴의 말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보면 그렇게 종합적인 그림이 나오겠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북한의 안전을 보호할 법적 보장이 없고, 양국 간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았으며, 적대는 70년간 이어졌지만 개인적인 관계는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노이 정상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볼턴은 트럼프에 대해 “서두를 필요 없다”는 태도였으며 그냥 “걸어 나오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양당의 팍스 아메리카나

로버트 조셉, 볼턴 등을 포함한 보수 네오콘은 북한과의 협상을 탈선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썼다. 이들 대부분은 냉전 이후 시대에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 지배력”을 갖추어 “대담하고 목적 의식적으로 미국의 원칙을 세계에서 추진하는 외교 정책”을 통해 “미국의 안보를 유지하고 미국의 이해를 증진”하는 것을 지지하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었다. “미국의 이해”뿐만 아니라 미국의 “가치에 적대적인 정권”에 반대하는 기조를 감안하면, 동등한 입장에서 공존을 추구하는 북한의 투 트랙 전략과 보수 네오콘의 정책은 처음부터 어울릴 수가 없었다. 비핵화가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부시 대통령은 북한 지도부를 독재라고 비난했다. 미국의 가치를 (선별적이기는 하지만) 공격적으로, 그리고 군사적으로 밀어붙이고 시행하는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보면 이런 말은 그 이상의 의미가 생긴다. 즉, 향후 전쟁과 개입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과의 협상을 방해한 것은 보수 네오콘만이 아니었다. 자유주의 매파도 마찬가지였다.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 대화에 나서기까지 했지만, 클린턴 정부는 북한을 “자기들 위주로 민주적 질서를 만들라고 위협”하는 “백래시 국가” 중 하나라고 했다. 오바마 및 조 바이든 정부를 포함한 자유주의 매파의 수단은 달랐을 수 있지만, 민주당과 민주당의 외교 정책 고문들도 먼로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지배력을 세계로 확장하는 군산복합체 외교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클린턴, 오바마, 현 바이든 정부의 공직자로 가득한 싱크탱크인 신미국안보센터는 주요 무기 제조사로부터 거액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와 동일한 수사를 보여준다. 미셸 플루노이(오바마 정부 시절 국방부 차관)와 커트 캠벨(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 회귀” 정책의 설계자이며, 바이든 행정부의 국무부 부장관)이 작성한 신미국안보센터의 첫 번째 보고서 유산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서는 (보수 네오콘의 더 공격적인 충동을 억제하기는 하지만) 미국이 “국제 사회의 뛰어난 리더”가 되어 “세계화 시대에 미국의 이해를 보호하거나 증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더 큰 프로세스의 일부로 인식했다면, 미국은 가장 성과가 좋았던 클린턴 정부에서조차 협상을 북한과 평화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무장을 해제할 수단으로 보았다. 비핵화가 전 세계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약소국이 핵을 보유하는 것을 막고 핵보유국(핵폭탄을 두 번이나 쓴 유일한 국가 포함)의 엄청난 핵 보유고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게다가 미국 외교 정책을 관찰해 온 이라면 누구든지 우방국이 적국이 될 수는 있지만, 적국에서 우방국으로 변하는 일은 거의 없다(미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는 한)는 사실을 알 것이다. 리비아는 2003년에 핵무기를 포기했지만(아니면 그랬기 때문에) 8년 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공격을 받았다. 오늘날 바이든 행정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실패한 “전략적 인내"에 몸을 담았던 안토니 블링컨과 캠벨 등 이전과 같은 자유주의 매파가 있다.


남북 관계를 단절하는 이유

미국과 협상이 잘 안 풀리는 것인데 왜 북한은 남한을 주적이라고 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윤석열 정부의 적대적인 태도이다. 대선 후보 시절에도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는 북한을 주적으로 표현하며 보수 지지 기반을 다졌다. 게다가 비핵화의 대가로 경제 개발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전의 보수 정권에서 내놓았던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제안은 아무리 좋게 봐도 감을 못 잡는 것이고, 나쁘게 보면 음흉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석열이나 이전 보수 정부의 정책이 북한을 도발했다면, 북한이 관계를 단절하게 만든 것은 자유주의 세력의 협력과 화해 시도 실패였다. 북한은 남한의 자유주의 세력의 평화통일 방식에 협력했다. 남한 자유주의 세력이 남한 사회에서 돌파구를 만들었고, 미국과 관계 정상화에 나서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한 자유주의 세력이 실패하자, 북한은 방식을 바꾸었다. 어찌 되었든, 자유주의 세력이 남북 관계 문제에서 실패를 거듭한 것은 애초부터 있었던 남한 사회의 모순 때문이다. 남한 정치 지형의 구조적 한계를 이해하려면 남한이 민주화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비호, 통제, 점령하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한국전쟁 후의 반공주의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남한의 구조적 한계

1945년에 미국의 손에 분단되기 전까지,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국가와 정체성을 이루지 않았다. 남북 분단은 역사, 사회, 문화적 근거가 없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은 38선을 임의로 그어 북쪽을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두게 했다. 남북의 차이는 분단 이후에 생겨났다. 남한에서는 미국이 일본 패망 후 자생적으로 생겨난 인민위원회와 풀뿌리 민중 조직을 거부했다. 그러고서는 미국 출신 반공 민족주의자 이승만을 내세우고 그의 주변을 일제에 부역했던 엘리트로 구성된 “한국의 가장 작은 그룹"으로 채웠다. 반면, 소련은 북한에서 인민위원회와 항일 독립운동가 김일성을 지도자로 인정했다. 한국 전쟁은 대리전이었으며, 그 규모, 파괴 정도 사망자 수, 기간 등은 냉전 기간 최초의 “열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남한에서는 한국 전쟁으로 친일 부역자의 지배를 합법화했다. 이는 친일 부역자의 지배와 자본주의 경제를 강화한 반공주의의 물질적 기반(즉, 전쟁 경험)이 마련되면서 가능해졌다. 민주화와 민중 운동에도 남한 사회는 반공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반공주의적인 국가보안법을 활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을 “종북 세력"으로 규정하며 탄압하는 것이 여전히 실효성 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남한에는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가 있으며, 전시작전권도 미국이 갖고 있다.

이런 구조적 한계로 대화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자유주의 정부조차 미국의 허락 없이는 북한과 평화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2000년에 6.15 공동 선언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했지만, 부시 정부의 보수 네오콘이라는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반미 정서를 등에 업고 집권한 노무현 정부조차 광범위한 반대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한국군을 파병했다. 하노이 회담이 실패한 직후에도 북한은 (임기 말이 다가오는) 문 대통령에게 북한의 자주를 인정함으로써 남북 관계를 빨리 개선하고 미국에 연연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북한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의 무조건적인 재개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는 2019년 10월에 미국과 협의하겠다는 대응으로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결국 남한 자유주의 세력은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까지, 각 정권에서는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럴 때마다 미국이 대화를 방해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정치적 고려 때문인지, 신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유주의 세력이 ‘남한이 평화롭게 경제적으로 북한을 흡수 통일한다’는 개념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한의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규정(3조)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따라 통일(4조)이 되어야 한다는 87년 헌법을 고칠 의지를 보인 적이 없다. 남북 관계의 전성기였던 김대중 정부 시기에조차 통일은 남한이 북한을 경제적으로 (다만 평화롭게) 흡수하는 안에 기반했다.


러시아와 중국 진영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북한

많은 이들은 북한이 러시아와 중국 진영에 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변화뿐만 아니라 이 세 나라의 관계에서 불협화음이 나는 것에 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더 중요하게는 주체사상에 구현된 북한의 자주에 관한 강한 열망과 통일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 러시아와의 동맹을 통한 생존 전략으로 노선을 바꾸었다면, 이는 미국이 그 방향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중 관계가 혈맹이라고 하지만, 이는 1980년대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약화했다. 중국은 미국 및 주변국과 관계를 정상화했고, 북한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대하고자 했다. 중국이 북한의 반대에도 남한과 관계를 정상화했을 때, 북한은 배신감과 함께 점점 고립되고 있음을 느꼈다. 중국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전략적인 위치를 고려하여 북한을 다른 나라와 동등하게 대하되, 북한의 생존과 관련해서는 예외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찬가지로 소련이 무너지면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약화했다. 소련은 북한의 경제 활동 및 무역에 상당한 지원을 제공했지만, 1995년에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북한과의 군사동맹을 갱신하지 않고 지원을 중단했고, 이는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겪은 기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제 한-미-일이 NATO와 유사한 동맹을 형성하자 북-중-러가 가까워지고 있다.


권력은 요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내주지 않는다

남한의 평화 운동을 평화 또는 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분류하게 되면, 각각 평화에 대해 너무 일반적인 관점(광범위한 의미의 평화) 또는 너무 지엽적인 관점(남북 관계에만 집중하는 평화)에서 평화 문제에 접근한다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에는 두 가지 방법을 하나로 합쳐 더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요구를 포함하도록 하여 역내 연대를 실현하고 남북한 민중이 직면한 특수한 지정학적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북한이 현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다시 확인하는 것이 평화에 기반한 프로세스에서 북한과 대화의 물꼬를 트는 시작이 될 것이다. 북한이 미국에 크게 영향을 받고 북한을 주적이자 흡수 통일의 대상으로 삼는 남한과의 평화 통일을 거부한 것이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열쇠는 남한이 자주를 회복하고 적대적인 정책이 아닌 북한 체제를 존중하는 평화로운 대화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 실제로 이는 남한에 자주를 쟁취하고 북한과 유의미한 대화에 나서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주변에서 방관하고 있으면 앞서 말한 조건은 물론, 역내에 필수적인 더 광범위한 의미의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 남한이 한반도와 이 지역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하려면, 평화 운동이 한데 모여 평화 실현에 나서라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토론과 공동의 대화를 통해 평화, 정의, 민중의 안녕이라는 공동의 기치를 도출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대화의 물꼬를 트고자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제안한다.

 

  1. 한반도 평화. 끝나지 않은 한국 전쟁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정성은 한반도 및 주변국 민중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반도 평화는 북한을 압박하고 고립시키는 것으로 달성해서는 안 된다. 이는 북한이 자주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 및 미사일 프로그램을 정당화하고 더 부추기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는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관계 정상화를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 핵심적으로는 미국이 북한과 외교 및 경제 관계를 정상화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1. 대만 해협의 평화. 역사적, 합법적으로 대만과 중국이 하나의 국가라는 근거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만이 중국 본토와 분리된 기간 동안 대만은 자기만의 문화와 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중국 본토에서 10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만이 중국의 안보 우려라는 관점에서 레드라인에 해당하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과 대만은 서로의 차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국, 대만, 미국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까지 말려들어 이들 국가에 재앙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쟁이 발발할 것이다.


  1. 동북아시아 평화 공동체. 동북아시아 평화에서 한반도와 대만 해협이 핵심 요소인 것처럼, 동북아시아도 한반도 평화의 핵심 요소이다. 역내 세력이 둘로 나뉘면 역내가 불안정해지고 대대적인 충돌의 불씨가 될 수 있다.


  1. 전쟁이 아닌 사회 문제와 기후변화에 맞선 투쟁. 남한, 대만, 일본은 출산률 저하부터 인구 고령화까지 다양한 차원의 사회 문제를 겪고 있다. 게다가 전 세계는 기후 위기에 직면했다. 민생을 개선하고, 기후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완화하며, 기후변화로 인해 바뀐 세상에 적응하는 데 들어가야 할 자원과 에너지가 군비로 소모되고 있다.


이를 구체적인 요구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남북 긴장을 고조시키는 주한 미군과 남한의 전쟁 훈련에 반대해야 한다. 그들은 통상적인 훈련이라고 하지만, 이런 훈련에는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군인과 전쟁 무기(핵무기 탑재 가능 전투기 등)를 동원하여 북한 수역 근처에서 지도자 참수, 핵 공격, 전면적인 북한 침공 훈련을 실시한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 전쟁 훈련이 실제 대만 침공을 위장한 것일 수 있다며 그 속성이 위험함을 지적하면서 의도치 않게 북한의 입장에 동조했다. 마찬가지로 대규모 한미 군사 훈련은 북한이 이에 맞서 군을 전면 동원하게 만들어 북한 경제에 타격을 준다. 게다가 미국이 했던 최대한의 제안 중에는 전쟁 훈련 중단도 있었다. 조지 H. W. 부시, 클린턴,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했을 때, 북한은 외교 제안으로 화답했다. 긴장 완화를 위한 군사 훈련 중단은 한미 양국의 전쟁 준비 태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한 세계 최대 국제 해상 전쟁 훈련인 환태평양 훈련(림팩)을 비롯하여 이 지역과 전 세계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모든 군사 훈련에 반대해야 한다.


  1.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 한다. 현재 주한미군에는 전쟁 시 미군과 남한의 군대를 모두 통솔할 권한이 있다. 남한이 전시 군 통제권을 되찾는다면 한미 합동 전쟁 훈련 참가 여부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아질 수 있다.


  1. 북-중-러가 가까워지도록 자극하는 한-미-일 삼각동맹 등 안보 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결과적으로 NATO가 러시아 쪽으로 동진한 것에서 촉발되었다면, 대만 해협과 한반도를 둘러싼 역내 분열은 역내 갈등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다국적 통합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미사일을 확실히 막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깨부숴야 한다. 미군에서도 인정하듯이, 유일한 억지책은 방어가 아니라 대규모 반격이다. 높아지는 수위의 압박으로 무너진 제방이 미치는 끔찍한 영향처럼, 이 전략은 상호 확증 파괴가 실제로 발동되었을 때 비로소 작동한다. 미사일이 발사되면 이를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미사일에 대응할 때 요격기가 불리하다는 간단한 이치에 바탕을 둔다. 총을 쏘려면 더 빠르고 정확한(즉, 더 비싸고 기술적으로 정교한) 총알만 있으면 된다. 그렇기에 값싼 미사일의 생산이 늘어나면 요격기는 이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1. 지역에서 서로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이런 연대는 누군가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중심으로 할 뿐만 아니라 역내 평화를 위한 더 큰 투쟁에도 중점을 두어야 한다. 각자의 투쟁에서 나오는 당장의 요구와 결과에 매몰되기 쉽다. 그러나 이 지역의 평화는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비전과 투자가 필요하다. 즉, 매년 열리는 오키나와의 5월 평화 행진, 기타 이 지역 내 특별한 기념일 등 동북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1. 최전선에서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전쟁과 군사화가 추상적이고 먼 나라 문제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사실 이 문제는 일본 오키나와 미군 기지 주변, 남한 소성리의 종말 고고도 지역 방어 체계 설치 지역, 또는 제주도 해군 기지 등 투쟁 현장의 인근 주민에게는 매우 구체적이며 즉각적인 문제이다. 이런 투쟁 대부분은 주민들의 일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내용에 노출되면서 사람들은 평화운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위험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지역에 평화를 실현하고,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며 전 지구적 위기를 해결하는 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공통 분모, 이해, 전략 및 전술적 목표에 관한 합의가 매우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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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Korean Central News Agency, “Respected Comrade Kim Jong Un Makes Policy Speech at 10th Session of the 14th SPA,” 2024년 1월 16일, kcna.kp.

[1] Korean Central News Agency, “Respected Comrade Kim Jong Un Makes Policy Speech.”

[1] Korean Central News Agency, “Respected Comrade Kim Jong Un Makes Policy Speech.”

[1] Frederick Douglas, “Frederick Douglas, If There is No Struggle, There Is No Progress (1857),” Black Past, 2007년 1월 25일, blackpast.org.

[1] Robert L. Carlin and Siegfried S. Hecker, “Is Kim Jong Un Preparing for War?,” 38North, 2024년 1월 11일.

[1] Korean Central News Agency, “Respected Comrade Kim Jong Un Makes Policy Speech.”

[1] Korean Central News Agency, “Respected Comrade Kim Jong Un Makes Policy Speech.”

[1] 2024년 4월 2일 진행한 이정철 교수와의 온라인 인터뷰 내용

[1] Kwang-soo Kim, “National Unification Front: Peace Discourse Must Completely Reverse to a Reunification Discourse” (in Korean), Tongilnews, 2024년 3월 19일.

[1] Kim, “National Unification Front.”

[1] Jong-woo Han and Jung Tae-hern, eds., Understanding North Korea: Indigenous Perspectives (London: Rowman & Littlefield, 2013), 217.

[1] Han, Understanding North Korea, 164.

[1] 미국이 북한에 투하한 폭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장에 투하한 모든 폭탄의 양보다 훨씬 많았다. 대부분 도시가 75~90% 정도 파괴되어 폐허로 변했다. Owen Miller, “Uncovering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Jacobin, 2020년 6월 25일.

[1] Robert Carlin and John W. Lewis, Policy in Context: Negotiating with North Korea: 1992–2007, (Stanford: Center for International Security and Cooperation, 2008), 3.

[1] Han, Understanding North Korea, 201

[1] Siegfried S. Hecker, Hinge Points: An Inside Look at North Korea’s Nuclear Program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23), 9.

[1] Carlin and Lewis, “Policy in Context,” 11.

[1] Carlin and Lewis, “Policy in Context,” 21.

[1] Hecker, Hinge Points, 35–36, 86.

[1] Amanda Erickson, “The Last Time the U.S. Was on ‘the Brink of War’ with North Korea”, Washington Post, 2017년 8월 9일.

[1] 경수로는 영변의 흑연 가서 기반 원자로보다 에너지 생산량이 더 많지만 무기화하기가 더 어렵다.

[1] Maria Ryan, “Why the US’s 1994 Deal with North Korea Failed—and What Trump Can Learn from It,” The Conversation, 2017년 7월 19일.

[1] 첫 번째 경수로 건설은 2003년에 끝나야 했지만, 기반 공사는 1996년이 될 때까지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2001년이 되어서야 기초 공사를 위한 콘크리트를 부었다.” 실제로 이로 인해 완공이 2008년으로 미뤄졌다. (Leon V. Sigal, “Did the United States Break the Agreed Framework?”  History News Network, n.d.)

[1] Niv Farago, “Washington’s Failure to Resolve the North Korean Nuclear Conundrum: Examining Two Decades of US Policy,” International Affairs 92, no. 5 (2016): 1131. 이 시기에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1995년~1996년 자연재해로 경제가 파탄나고 기아가 발생하는 등 여러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Farago, “Washington’s Failure to Resolve the North Korean Nuclear Conundrum,” 1131)

[1] Hecker, Hinge Points, 87; Farago, “Washington’s Failure to Resolve the North Korean Nuclear Conundrum,” 1132.

[1] Hecker, Hinge Points, 35–37.

[1] Hecker, Hinge Points, 37.

[1] Hecker, Hinge Points, 87

[1] 실제로 9.11은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의 1997년 미국의 방위 재구축 보고서에서) 보수 네오콘이 이해했듯이 미국이 “내일의 지배력 창출”을 위한 군사 기술 혁신에 박차를 가하게 할 수 있는 “재앙적이고 촉매가 되는 사건”이었다(Thomas Donnelly, Rebuilding America’s Defenses: Strategy, Forces and Resources for a New Century [Washington DC: Project for a New American Century, 1997], 50–51).

[1] Hecker, Hinge Points, 38

[1] Hecker, Hinge Points, 40–41.

[1] Hecker, Hinge Points, 120–21.

[1] 강경파 중 한 사람이 바로 로버트 조셉으로, 그는 북한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협상에 반대했다(Hecker, Hinge Points, 121, 118).

[1] Hecker, Hinge Points, 123.

[1] Jay Solomon and Neil King Jr., “How U.S. Used a Bank To Punish North Korea,” Wall Street Journal, 2007년 4월 12일.

[1] Hecker, Hinge Points, 164.

[1] Hecker, Hinge Points, 205.

[1] Hecker, Hinge Points, 206.

[1] Hecker, Hinge Points, 224.

[1] Hecker, Hinge Points, 209.

[1] Hecker, Hinge Points, 250–51.

[1] 한 단계 높은 고급 기술을 터득하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대폭 확산의 가능성이 높다. 더 많은 양의 핵물질을 더 비밀리에 제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Hecker, Hinge Points, 248).

[1] Hecker, Hinge Points, 255–56.

[1] Hecker, Hinge Points, 258.

[1] Hecker, Hinge Points, 262.

[1] Hecker, Hinge Points, 281–82.

[1] Hecker, Hinge Points, 318.

[1] Hecker, Hinge Points, 339.

[1] Hecker, Hinge Points, 333.

[1]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Statement of Principles,” 1997년 7월 3일.

[1] Project for the New American Century, “Statement of Principles”; Francis Fukuyama, “The Neoconservative Moment,” National Interest, no. 76 (2004년 여름호): 59.

[1] Anthony Lake, “Confronting Backlash States,” Foreign Affairs 73, no. 2 (March/April 1994).

[1] John Bellamy Foster, John Ross, and Deborah Veneziale, The United States Is Waging a New Cold War, Tricontinental, 2022년 9월, 38, thetricontinental.org.

[1] Brett Heinz and Erica Jung, The Military-Industrial-Think Tank Complex: Conflicts of Interest at the Center for a New American Security, Revolving Door Project, 2021년 2월, therevolvingdoorproject.org.

[1] Kurt Cambpell and Michèle Flournoy, “The Inheritance and the Way Forward,” Center for a New American Security, 2007년 6월 27일, cnas.org.

[1] Reza Sanati, “A Troubling Lesson From Libya: Don’t Give Up Nukes,” Christian Science Monitor, 2011년 8월 30일.

[1] Hyuk-chul Kwon, “Yoon Suk-yeol’s Loose Security Tongue, after Preemptive Strikes Now North Korea as the Main Enemy” (in Korean), Hankyoreh, 2022년 1월 17일, hani.co.kr.

[1] Bruce Cum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5), 186.

[1] Cum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194.

[1] 커밍스가 지적했듯이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가난한 농민이고 “극소수가 대부분의 부를 점유"하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또는 민주적 정당의 기반은 없었다(Cum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193).

[1] 자유주의 세력은 2004년~2008년에 노무현 정부 시절과 더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던 2020년~2024년 문재인 정부 시절에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통제했다. 이 시기에 자유주의 세력은 촛불 집회 이후 더 강력해졌지만, 국가보안법 철폐를 추진하지는 않았다.

[1] 대선 6개월 전인 2002년 6월 14일, 미군 2개 부대가 낮에 하교 중인 한국 여중생 2명을 군용 트럭으로 쳐서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발생했다. 미군은 관련자를 “과실 치사"로 석방했고, 그 결과 반미 시위가 촉발되었다.

[1] “Pressure on South Korea: Stop Taking Your Cue from the US and Act” (in Korean), BBC News Korea, 2021년 10월 5일.

[1] Ji-won Roh, “Moon Jae-in Will Try to Resolve Sanctions Around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d the Geumgang Tourism,’” (in Korean) Hankyoreh, 2019년 10월 19일.

[1] 북한의 통일 접근 방식을 살펴보면, 사회주의 헌법 9조에서는 북한의 사회주의 달성, 종국에는 한반도 통일이 과업이라고 되어 있다.

[1] 햇볕 정책은 태양과 바람이 지나가던 사람의 코트를 누가 더 빨리 벗게 만드나를 두고 내기를 하는 이솝 우화에 기반했다. 바람이 먼저 나서서 세찬 바람을 일으켜 남자의 코트를 벗기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코트를 더 꼭 여몄다. 다음으로 태양이 나섰다. 태양은 강렬한 빛을 내며 기온을 높였다. 그러자 남자는 스스로 코트를 벗었다. 이처럼 햇볕 정책의 접근 방식은 화해와 협력을 활용하여 북한이 스스로 문을 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북한이 남한의 더 큰 경제에 흡수될 것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었다.

[1] 북한은 중국 공산당이 중국 내전 당시 국민당과 싸우는 것을 지원했으며, 중국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의 반격을 물리쳤다.

[1] Han, Understanding North Korea, 191.

[1] Han, Understanding North Korea, 202–3.

[1] Khang Vu, “Why China and North Korea Decided to Renew a 60-Year-Old Treaty,” The Interpreter (Lowy Institute), 2021년 7월 30일; “The Highs and Lows of Russia, North Korea Relations,” Al Jazeera, 2023년 9월 13일.

[1] Jeffrey Wagner and Dae-Han Song, “Trilateral Missile Defense System a Step Towards Asian NATO,” Counterpunch, 2023년 12월 1일.

[1] Dae-Han Song, The New Cold War is Sending Tremors through Northeast Asia (Tricontinental Institution for Social Research, 2024)

[1] Mark F. Cancian, Matthew Cancian, and Eric Heginbotham, The First Battle of the Next War: Wargaming a Chinese Invasion of Taiwan (Washington, DC: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2023) 54.

[1] 전시작전권 환수 논의는 반 주한미군 정서가 높았던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보수적인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면서 전시작전권 이양은 연기되었다. 전시작전권에 관한 논의는 문재인 정부 시절 재점화되었으나, 실제 임기 내에 실현하지는 못했다. 이 과정은 보수가 다시 집권하면서 사실상 중단되었다(Johannes Nordin, “Taking Back Control: South Korea and the Politics of OPCON Transfer,” Institute for Security and Development Policy, January 2022, isdp.eu).

[1] 실제로 미국을 미사일 공격에서 보호하는 지상 기반 외기권 방어 시스템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통제되는 훈련에서도 유효성이 55% 밖에 되지 않았다. 90%의 신뢰도를 달성하려면 핵탄두 하나가 발사될 때마다 3대의 요격기를 내보내야 할 것이다.

GMD: Frequently Asked Questions,” Center for Arms Control and Non-Proliferation, armscontrolcenter.org.

[1] “GMD: Frequently Asked Ques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