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붉은별

글: 정도영 (컨텐츠팀,ISC)

번역: 황정은 (사무처장,ISC) 

미소공동위원회 환영시민대회에 참석한 박헌영과 여운형 (출처: 뉴시스)

수백 명의 한국 혁명가는 일제 강점을 끝내겠다는 희망을 품고 소련으로 건너갔다. 이들은 소련에서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감이나 총살의 위험을 무릎쓰고 몰래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공산주의자들은 공장과 농촌에서 '적색 노조'를 통해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마르크스주의 학자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최신 저서 <붉은 시대: 1919~1945년 한국에서 운동과 문화로서 공산주의>에서 식민지 시대 한국 공산주의의 역사를 생생하고도 자세히 썼다. 티호노프는 디아스포라에서 한국 공산주의의 기원과 초기 운동을 육성하는 데 있어 코민테른의 중요한 역할을 분석했다.

혁명의 해, 1919년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혁명은 들불처럼 퍼졌다. 볼셰비키는 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봉기의 물결을 일으켰지만, 가장 큰 파장은 식민지 주변부에서 일어났다.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혁명으로 공식적인 독립을 쟁취했고,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반제국주의 정서에 다시 불을 붙이며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었다.

한국도 이런 세계적인 자각을 피할 수 없었다. 3월 1일, 우드로 윌슨이 성의없는 민족자결권을 제안한 후 한반도의 200만 민중은 최초의 대규모 독립 만세 운동을 벌였다.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식민지 당국은 비무장한 시위대를 향해 발포부터 총검 난사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탄압으로 대응했다. 악명 높은 사건으로는 제암리 마을에서 일본군이 생존자까지 모두 불태우는 등 마을 주민 모두를 학살한 일이 있었다.


이 시점까지 3.1운동을 조직했던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 폭발을 활용하지 못했다. 대부분 엘리트로 구성된 지도부는 대중, 특히 토지를 요구했던 수백만 농민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선동하기를 거부했다. 일제의 탄압에 급진화되고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게 환멸을 느낀 많은  청년은 민족 해방으로 가는 길로 이끄는 이념을 찾기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다.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식민지 문제를 논의하는 박진순과 레닌 

(출처: 성균관대/붉은 시대, 임경석 제공)

해외에서 시작한 한국의 공산주의 

한국인은 중국, 일본, 특히 러시아 디아스포라를 통해 공산주의를 처음 접했다. 시베리아와 연해주 지역에서만 500명의 고려인이 볼셰비키가 되었다. 많은 교육을 받고 다양한 언어를 구사한 해외 동포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산당 선언>의 최초 한국어 번역본은 상하이에서 출판했으며, 소련에서 공부하고 오래 가지는 못했던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였던 여운형이 번역을 맡았다. 

결국 디아스포라 한인들은 이르쿠츠크와 상하이에서 두 개의 공산당을 결성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가진 러시아계 한인 지식인들이 창당했다. 식민지 시대 가장 중요한 한인 공산주의자였던 박한용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상하이 고려공산당은 국외에 거주했던 지식인과 이동휘와 같은 항일 빨치산 모두를 포함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과는 달리 상하이 고려공산당원은 계급 투쟁에 대해 훨씬 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이는 온건 민족주의자와 폭넓은 전선을 구축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925년 두 당이 합당한 후에도 한국의 공산주의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와 협력하면서 계급 독립을 요구하는 분파와 민족 해방이라는 당면 목표를 위해 계급 투쟁을 미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


코민테른

독일과 헝가리에서 공산주의가 패배한 후 볼셰비키는 동구권에서 식민지 대중을 조직하는 데 집중했고, 여기서 한국인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는 200명의 한국인이 고국에서 적색 노조를 조직하거나, 코민테른 요원이 되거나,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1회 극동민족대회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많은 대표단을 구성했다. 


1회 극동민족대회 연설하는 한국 대표단(출처: 플랫폼 C)

그러나 소련은 일본 못지않게 한국 공산주의자의 삶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대숙청을 둘러싼 편집증과 정치적 경쟁자의 거짓 비난이 결합되어 많은 1세대 한인 공산주의자는 죽음을 맞이했다. 스탈린은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였던 김타냐의 처형을 직접 승인했다. 최악의 상황은 1937년 20만 명의 고려인이 '일본 간첩' 혐의로 집단 기소되어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된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당원과 빨치산 출신을 포함해 약 4,000명이 사망했다.


2 단계 혁명 

코민테른의 지대한 영향력은 한국 공산주의자의 강령이 외부의 정치적 조건에 영향을 받고 형성되었음을 뜻한다. 주요한 정치적 체제인 2단계 혁명도 코민테른의 설계에 따른 것이었다. 2단계 혁명은 민족해방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목표를 위해 부르주아지의 가장 진보적인 부류와 통일 전선을 구축하는 1단계와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는 2단계로 나뉜다.

이러한 통일 전선 전략의 결과로 조선공산당의 첫 번째 정치강령은 독립적이고 주권이 있는 한국을 세우고 일본인 재산과 대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것과 같은 온건한 경제적 요구를 촉구했다. 온건한 민족주의자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강령에서 완전한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소작료를 수확량의 3분의 1로 낮추기로 했다. 한국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열망은 나중에 코민테른이 지원한 중국 1차 국공합작에서 영감을 받아 합법적 조직인 신간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학살당하자 코민테른은 계급 간 동맹 노선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는 급격한 좌경화로 대응했다. 1928년 강령에서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군대와 경찰을 철수하는 것과 본격적인 토지 분배를 촉진하기 위해 '인민공화국'을 촉구했지만, 2단계 체제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았다. 또한 1928년 강령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의 한국 자본가가 노동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허용했다. 


강령의 재해석

해외에 있는 지식인들은 정치적 노선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국내의 조직가들은 대부분 농민과 노동자 계급 출신이었다. 이재유와 같은 국내 활동가는 코민테른에서 나온 강령을 국내 상황에 맞게 재해석했다. 유능한 조직가였던 이재유는 한국에 거주하던 좌파 일본인 교수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공장과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해 학생 조직을 만들었다.

이재유의 옥중 사진(출처: 국립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붉은 시대)

또 한가지 중요한 부분은 국제주의다. 이재유는 중국의 소비에트와 일본 학생들과도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1933년 6월, 이재유의 이러한 노력은 320명의 여성 비단 노동자 파업으로 결실을 맺었지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어 공식 기록에서는 사라졌다.

유산 

식민지 시대에 공산주의자는 한반도에서 항상 표적이 되어 탄압받던 집단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준비했던 인민위원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코민테른은 공산주의자에게 대중의 지지를 구축하라고 조언했지만, 우익 민족주의자는 망명지에서 명맥을 잃었고 국내의 엘리트는 친일을 하면서 신뢰를 잃었다.

안타깝게도 미군의 점령과 한국전쟁으로 한국의 좌파는 냉전의 첫 희생양이 되어 사라졌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적이고 국제적인 한국의 급진적인 희망이었으며, 식민지에 대한 소련의 헌신으로 그 꿈은 계속 살아 있었다. 코민테른의 지도가 부족했을지라도 한국의 공산주의자가 박해에서 살아남는 데 필요한 자원과 인맥을 제공했고, 국제 연대와 지역 조직을 결합해 이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