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의 경험이 남긴 것들
혁명은 베네수엘라에게 마치 자아를 찾던 개인이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 같았다. 내셔날 판떼온(독립기념관)에서의 첫인상이 그랬다. 첫날, 관계자들과 독립기념관을 찾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식이라곤 ‘우고 차베스’대통령의 이름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곳 독립기념관을 답사한 이후 순식간에 이해의 폭이 확 넓어졌다. 이곳에 모셔진 142명, 독립 운동가의 일생이 곧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침략에 대항했던 독립 영웅들과 민중들 그리고 지배자들에게 빼앗긴 권리를 찾고자 했던 기나긴 투쟁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1863년의 미국 노예해방에 앞서 1854년 노예를 해방시켰음은 물론 5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으며 토지개혁을 성공시킨다. 스페인 지주들과의 이 전쟁은 베네수엘라 역사상 가장 악독한 전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토지개혁은 결국 스페인의 세력을 약화시켜 베네수엘라 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마침, 시몬 볼리바르의 유해를 지키는 근위대 교대식을 목격하였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시몬 볼리바르’ 하지만 이후 이 이름은 베네수엘라에 있는 동안 수없이 되 뇌이게 되는 이름이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인 그가 꿈꾸는 하나 된 땅은 아직도 유효한 그들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곳곳에 그를 기리는 형상과 이름을 새겨 넣는다. 그들의 역사를 몰랐다면 우상화라는 오해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랬기에 첫날의 내셔날 판테온에서의 역사공부는 이후 여정을 아주 부드럽게 흡수하게 하는 소화제와도 같은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늘 잘 흡수되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벽화 등에서 보여 진 경직된 모션과 일률적인 이미지 등은 다소 거부감이 들 때도 있었다. 다양성이 훼손된다면 이 또한 다른 부작용을 낳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기념관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차베스의 의도는 베네수엘라의 정체성 찾기의 첫 걸음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둘째 날, 사회주의 계획도시인 까리비아시를 방문하였다.
시 외곽에 자리한 이 도시는 자연재해로 집을 잃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다. 약 2만개의 주택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학교와 보건소, 메르깔 등이 있다. 거주민들은 주로, 인근의 시멘트 공장이나 물탱크 공장에 다니거나 인근 도시로 일을 나간다. 3년간 무상거주 후 조금씩 돈을 갚아나가는 형식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른 도시의 주택들에 비하면 100분의 1 정도의 싼 가격에 제공된다.
학교방문을 통해 어린이들의 수업과 급식시설을 살펴보았다. 아침과 점심이 무상으로 제공되고, 가방, 학용품 등의 필요한 물품들이 무상 지급 된다고 한다. 텃밭을 가꾸거나 운동을 하는 시설 등이 아직은 미비한 편이긴 하나 이들에겐 변화를 통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보였다.
주민 라디오 옷 공장, 제과점 등 주민들의 교육을 통해 직업을 찾고 이를 다시 공급하여 경제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자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싼 가격만큼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고민들이 수반되어야 할 듯 보인다.
무상의료는 뜻밖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의사들이 아닌 쿠바의료진들에 의해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베네수엘라의 의사들인 경우 영리를 쫓아가기에 이들의 빈자리를 쿠바의료진이 메우고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2년간 자원봉사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에서 사회주의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1년에 약170명이 무료 교육을 통해 의료인으로 탄생하고 있다. 이후 이들의 책임 하에 무상의료가 가능할 때까지 지속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바램이 언제 실현될 수 있을 지는 조금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에 노출된 그들에게 물질의 유혹을 뿌리치라는 요구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이다. 이미 두 나라는 교육철학에 앞서 물질욕망을 대하는 사회시스템이 다른 것은 아닐지...(이는 쿠바를 다녀온 후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음.)
카라카스 내의 우고차베스시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오후를 넘기고 있을 무렵이다. 엘 시스테마 제도로 음악 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따라 그들의 연주장소로 다시 이동하였다. 낯설게도 해군기지내 야외무대가 공연장이다. 군인들과 학생들이 뒤섞여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내게는 익숙치않았다. 이후 몇 번이나 군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거리낌 없이 섞이는 모습들을 목격하였는데 그때마다 낯설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과거 억압적인 군인이 아닌 시민과 소통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변모한 느낌이다.
아이들의 연주와 노래는 훌륭했다.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정을 주었던 어린 학생들이기에 더욱 애정이 갔다. 어려운 여건의 학생들에게 음악을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불어 넣고자 했던 제도, 이는 혁명이전부터 시행되었던 제도이다. 하지만 누구에 의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이미 세상을 향해 당당히 소리칠 수 있는 개인들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같은 이방인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풍요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 만약 그들이 훌륭한 음악가로 거듭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에게 아주 중요하고 큰 따스한 마음만큼은 고스란히 남아있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탐욕적인 싸움에 아이들이 더 이상 희생당하지 않도록 정치적 안정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가는 마구 요동을 치고 있다. 전 세계가 극우로 돌아서는 위험한 시대 앞에서 우리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그들에게서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뜻있는 이들의 거국적인 연대를 바랍니다.
시몬 볼리바르의 뜻처럼 강력한 힘으로 강자에게서 약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그 날까지 !!!
조미영((사)제주4·3연구소 이사 /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