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아프리카 이해하기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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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프레드릭 카수쿠(영 소셜리스트 리그, 케냐)
번역: 지민경(번역팀, ISC)
심태은(The 숲 한글판 편집장, ISC)

[본 글은 케냐의 영 소셜리스트 리그 [1]의 활동가 프레드릭 카수쿠 [2]가 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재의 사회정치 및 경제적 현실을 분석한 것으로, 총 3부에 걸쳐 연재할 시리즈의 첫 번째 글입니다.]

나는 아프리카가 한 나라인지, 내가 아프리카의 어느 도시에서 왔는지 수없이 질문을 받아왔다. 아프리카는 3,030만 제곱 킬로미터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이자, 2016년 기준으로 인구가 12억 2천만 명으로 인구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곳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다양한 지형, 언어, 경제 및 상업 블록에 따라 구분된 5개 지역에 54개의 국가가 있다. 인류의 발상지일 것이라는 가능성과 대서양 노예무역이라는 불명예 이외에는 식민지화 이전의 아프리카 문명, 그리고 그 후의 현대 아프리카 역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 아프리카가 직면한 문제와 이에 대한 해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대륙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식민지배 이전의 아프리카 문명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인도 잘 모른다. 아프리카인으로서 자국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아프리카 역사에 대한 관심이나 자부심은 적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인은 유럽인이 원시적인 아프리카인을 ‘문명화’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는 사바나 숲에 살던 “초기 인류”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유럽의 침략과 이에 따른 노예교환으로 갑자기 넘어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식민지배가 부정적인 영향을 있기는 했으나, 결국에는 오늘날 아프리카가 누리고 있는 현대화라는 혜택을 가지고 왔다고 결론짓는다. 고대에 상호 존중하며 공존했던 위대한 이집트, 누비아, 스와힐리 [3] 문명은 이 역사에서 빠져 있다. 우리의 위대한 문명에 대한 지식 부족은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만약 우리가 항상 약하고 굴종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가?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하나의 아프리카에서 무엇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시켜 줄 것이고, 우리는 천연 자원과 부를 착취하고 있는 외국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대륙적 차원이 아니라 각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이 팽배한데, 이는 우리를 분열시키고 정복하기 쉽게 만들 뿐이다. 하나로 단결한 아프리카는 달러를 대체할 공통 통화를 사용하거나, 아프리카의 산업화를 위해 천연자원을 지켜서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에 사용하고, 그러고도 남는 경우에만 수출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으로 제국주의와 신 식민주의에 대한 멍에로부터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유로워 질 것이다.

1884-85년 베를린 회의 전후 (아프리카 쟁탈전 및 분할)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의 공식적인 식민지배는 1884-85년 베를린 회의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회의 전의 유럽과 아프리카는 식민지 주종 관계가 아닌,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15세기부터 유럽인, 특히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사람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직물과 금속 같은 상품을 판매하고 향신료, 상아, 금 둥을 수입해 갔다. 1498년,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 [4]는 케냐의 말린디 [5]에 기항하여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만큼 도시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유럽이 알고 있던 것보다 상업의 규모가 훨씬 크고 아마도 더 부유할 것”이라며 놀랐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도시들은 금, 상아, 거북이 등껍질, 구슬, 구리, 면직물, 도자기 등의 해상무역을 통해 번영했다. 1800년대에 들어서는 유럽의 열강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과 강고한 무역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아프리카 쟁탈전’을 촉발시켰다. 레오폴드 2세는 1876년에 국제 아프리카 협회 [6]를 만들어 아프리카 대륙을 연구하고 ‘문명화’하고자 했다 [7]. 또한 1878년에는 국제 콩고 협회 [8]를 결성했다. 국제 아프리카 협회가 인도주의적 활동을 했다면, 국제 콩고 협회는 좀 더 노골적인 경제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콩고 협회의 외국인 투자자를 기만하고 설득하여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는 것이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하는 그의 비밀 연구에 재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1881년에 레오폴드 2세의 계획 [9]을 알게 된 프랑스는 피에르 드 브라자 [10]를 중앙 아프리카 서콩고 분지로 파견해 새롭게 건설된 브라자빌 [11](현 콩고 공화국 수도)에 프랑스 깃발을 꽂으려 했다. 스페인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맺은 오랜 조약에 근거해 포르투갈은 재빨리 동일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1884년에 포르투갈은 전 동맹국인 영국과 조약을 맺어 육지에 둘러싸인 벨기에의 콩고 자유국이 대서양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헨리 모턴 스탠리의 탐험과 콩고 강 유역 지도 제작(1874-77년)으로 유럽 지도에서는 아프리카 대륙 내의 ‘미지의 땅 [12]’이 전부 사라졌다.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 및 벨기에 등 열강국들은 이 아프리카 대륙 및 자원 쟁탈전에서 현지의 기타 국가들을 멋대로 구획하면서까지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1882년에 영국은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해안가 지배 범위와 프랑스의 중앙 아프리카에서 이티오피아, 나일강 및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동진을 보며, 자국의 이집트 및 인도제국을 통한 주요 교역로가 위협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집트의 재정 붕괴와 뒤이은 소요사태를 구실로, 영국은 명목상의 오토만 이집트에 개입, 지배권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수단(후에 영국령 소말릴란드 [13]) 지배하게 되었다.

독일의 아프리카 진출이 좌절된 것에 대한 외교적 해법을 찾고 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14]는 베를린 회의에 14개국을 초청하여 아프리카를 분할 통치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려 했다. 이후 제정된 베를린 결정사항 [15]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면서, 모든 나라에 콩고 강 유역에서의 교역 자유와 니제르 및 콩고 강에서의 항행의 자유를 보장했다.

베를린 결정사항에 따르면, 한 국가가 영토를 식민지화 하기 위해서는 그 주변에 인접한 모든 국가에 이를 알려야 하며, 이 과정은 ‘실효지배’ – 땅에 깃발을 꽂고, 그 지역의 지도자와 조약을 맺은 후 행정과 경찰기구를 건설해 해당 지역을 관리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 – 을 통해 검증되어야 했다. 이 원칙은 유럽 열강이 영토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과 각자의 해외 영토의 경계 – 때때로 실효지배가 식민지 간 경계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 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것이었다.

이 회의는 유럽 열강이 유럽 내에서 잠재적인 적대 상황을 해결하고 분쟁 없이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공통의 절차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절차는 미국, 러시아, 일본이 아프리카를 넘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더욱 시급하게 요구되었다.

식민주의는 이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16] 아프리카 거의 전 대륙에 도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아프리카가 다시금 독립했을 때, 아프리카 사람들은 분열된 국가를 이어받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 국민을 보내 해당 영토 내의 입법, 행정, 민정을 지배하는 것을 통해 직접적인 통치를 행했고, 기존의 지역적 권력 구조를 통제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는 상당수의 유럽인들이 영구 정착하여 직접적으로 지배했다. 이들은 식민지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특별한 정치, 경제적 권리와 보호를 요구했다. 이러한 정착인들의 안전과 번영은 방대한 수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 탄압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 정착인이 식민지화 한 곳은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짐바브웨와 잠비아(당시 남, 북 로디지아 [17]), 앙골라, 모잠비크 및 나미비아(당시 서남아프리카)에 이른다. 네덜란드, 독일, 포르투갈 정착인도 이들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남아프리카 지역에 더해 케냐 동부에는 영국 정착인이, 알제리아 북부에서는 프랑스 정착인이 이러한 식으로 아프리카를 지배했다.

Notes:

  1. Young Socialists League
  2. Fredrick Kasuku
  3. 고대 이집트는 수학과 과학의 발상지이자 피라미드로 유명하다. 오늘날 수단에서 발생한 누비아 문명은 현존하는 255개 피라미드 중 다수의 튼튼한 피라미드를 남겼다. 이들 문명이 이룩했던 기술 진보의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4. Vasco Da Gama
  5. Malindi
  6. International African Society
  7. 유명한 탐험가인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가 그 임무를 맡았다.
  8. International Congo Society
  9. 1878년에서 1885년까지, 스탠리는 콩고 자유국(Congo Free State)을 건설하라는 비밀 임무를 띠고 레오폴드 왕의 사절로써 콩고로 돌아갔다.
  10. Pierre de Brazza.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탐험가, 정치가, 외교관
  11. Brazzaville. 피에르 드 바라자의 이름에서 유래
  12. terra incognita (테라 인코그니타)
  13. British Somaliland
  14. Otto von Bismarck
  15. 서아프리카에 대한 베를린 회의 기본 결정사항(General Act of the Berlin Conference on West Africa)
  16. 이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배를 막아냈고, 라이베리아는 논란의 여지는 있으나 1824년 미국인들에 의해 건국되었고 이후 해방된 노예를 본국으로 송환하지 않고 정착시키기 위한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 두 국가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 대륙은 직간접적인 식민지배 하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티오피아조차 2차 이탈리아-이티오피아 전쟁(1935-1939년) 후 잠깐이나마 이탈리아 군정 하에 놓이게 되었다.
  17. Southern and Northern Rhode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