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을 포기한 문재인 대통령과 탈핵운동의 쇄신
이헌석(ISC 자문위원,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탈핵 : 핵발전소를 줄이는 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 ‘탈원전’이란 말이 한국사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 이전에는 흔히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활동을 ‘반핵운동’이라고 불렀다. 반핵(anti-nuclear)란 전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다. 보통 핵발전소와 핵무기, 핵폐기장이나 핵재처리까지 다양한 핵에너지의 이용에 반대하는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우리 사회에선 ‘반핵’이란 말이 급속히 ‘탈핵’으로 바뀌었다. 탈핵(脫核)이란 말 그대로 핵발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핵발전 위주의 전력정책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 등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으로 바꾸는 일련의 행위를 말하며, 이는 에너지 수요관리 등 종합적인 에너지전환 정책을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표현이 바뀐 것은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반핵보다는 실제 에너지정책을 바꾸기 위한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에너지자립마을, 가정용 미니 태양광 보급,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 사업 등 에너지정책을 바꾸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기존 반핵운동보다 폭넓은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핵발전에 반대하는 입장은 변함이 없지만, 이를 통해 에너지 공급체계를 바꾸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서 ‘핵발전소를 줄이는 일’을 하는 것이 탈핵의 의미가 될 것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와 시민사회의 대응
탈핵운동은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로 확대되어 왔다. 반핵운동은 과거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과 환경단체가 주요 주체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종교계와 생협, 여성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확대되었고,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 다양한 이들이 별도의 탈핵모임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각 정당 후보들이 탈핵정책을 발표하고 신고리 5,6호기 건설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은 모두 이런 활동의 성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정치권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래 공약이었던 ‘신고리 5,6호기 건설 백지화’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로 입장을 바꾸었다. 이에 대해 보수야당들은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밝혔던 기존 입장을 무시한 채 건설 강행을 외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 적극 대응하기로 결정하고 공론화 과정에서 핵발전의 문제점과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의 필요성을 적극 알렸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 후퇴된 상황에서 공론화에 함께 해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신고리 공론화가 국민의 손을 결정되는 첫 에너지 정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며, 국민들을 설득함으로써 탈핵 실현을 앞당기고자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연일 보수언론은 탈핵정책과 재생에너지의 악의적인 뉴스를 쏟아내었다. 보수 야당들은 일제히 정부의 탈핵정책과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비판하고 나섰다. 반면 여당은 ‘중립’이라는 이름하에 공식적으로 신고리 공론화에 대한 발언을 자제함으로써 보수 야당이 신고리 공론화 국면을 주도하도록 만들었다. 한수원은 막대한 인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광고와 홍보물 배포를 진행했다. 그리고 공론화 소통협의회와 각종 토론회에서 그간 정보력을 바탕으로 집중공세를 펼쳤다. 신고리 5,6호기에 대한 모든 정보는 한수원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한수원을 통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세부적인 사항을 알 방법이 없다. 특히 한수원은 공기업이기 때문에 공론화 초기부터 한수원의 중립은 매우 중요한 논쟁꺼리였지만, 오히려 이관섭 한수원 사장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를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한수원이 조직적으로 건설재개측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정부출연연구기관(Government-funded research institutes)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국원자력연구원(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KAERI), 에너지경제연구원(Korea Energy Economics Institue, KEEI) 등 정부출연연기관은 그간 국가에너지정책을 만들어온 인사들이 건설재개측 발표자로 참여하는 일들이 건설 중단측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되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공사를 일시 중단시키고 향후 어떻게 할지를 국민들에게 물어본 것은 정부였는데, 정부가 출연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공론화기간 내내 벌어졌다. 이와 같은 공론화 진행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문제제기를 계속 했으나, 공론화위원회는 이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다며 이를 용인했다.
40여년 이상 우리나라 핵산업을 이끌어온 핵산업계와 시민단체의 역량차이는 너무나 컸다. 그 결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선 59.5%의 시민참여단이 건설재개를 선택했다. 공론화 기간 동안 제기되었던 공정성 시비 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공론화였기에 너무나 아쉬움이 많은 대목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핵포기 선언과 향후 대응
10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브리핑을 통해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를 선언했다. 그는 브리핑에서 현 정부에서 모두 4기의 핵발전소가 새로 가동되기 때문에 실제로 핵발전소의 개수가 줄어드는 것은 다음 정부부터라는 점을 밝혔다. 또한 다음 정부가 탈핵기조를 유지할수 있도록 천연가스와 재생에너지 확대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탈핵이란 핵발전소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발언은 공약이었던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폐기한데 이어, 탈핵정책도 포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탈핵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불과 5개월만에 벌어진 일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 신고리 5,6호기 핵발전소가 건설된다 할지라도 탈핵운동이 끝난 건 아니다. 핵발전소의 위험성과 미래세대에 책임을 전가하는 비윤리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고리 공론화 기간 동안 묻혀 넘어가 버린 영광 한빛 4호기 안전성 문제, 핵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Nuclear Safety and Security Commission, NSSC) 강화문제, 고준위핵폐기물 문제 등 핵발전으로 인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안들 역시 이번 공론화와 전혀 상관없는 탈핵운동의 현안들이다.
이번 공론화는 탈핵운동 진영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결과적으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용인해 준 것아니냐는 비판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달의 숙의 기간동안 참여해준 시민참여단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한 격차와 역량 한계로 탈핵진영이 시민참여단을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애초 탈핵을 주요한 정책으로 내건 문재인 정부의 공약파기 문제는 공론화와 무관하게 비판받아 마땅한 문제이기도 하다.
공론화 이후에도 탈핵운동은 계속 되어야 한다. 정부의 핵발전소 증설계획은 또 다른 문제와 갈등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후 핵발전소로 인한 문제점이 남아 있는 한 핵발전소로 인해 불안해 떠는 주민들은 계속 있을 것이다. 그간 대응의 문제점과 평가를 바탕으로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쇄신해야 하는 과제 역시 탈핵운동의 몫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